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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무너지던 날

by 맑은돌

베트남 법인에 발령받은 이후, 회사가 지속적으로 성장해 가던 시절에 코로나가 터졌다. 이 기간 중에 베트남은 강력한 봉쇄정책을 실시했다. 특히 2021년의 경우에는 거의 반년 정도를 호치민에 있는 가족에게 갈 수 없었고, 회사가 위치한 지방의 산업공단에서 지내야만 했다. 직원들이 퇴근하지 않는 조건으로 공장을 운영할 수 있는 기간이었기 때문에, 생산부서는 남자 직원 전원, 그리고 관리부서는 팀별로 남자 직원 한 명씩 회사에 남아 같이 생활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중 법률팀에서는 매니저 융(Dung)이 회사에 남게 되었다.


일과를 마치는 저녁 5시가 되면, 다들 할 일이 없었다. 유튜브를 보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했다. 그리고 서로 음식을 만들어 함께 나누면서 술을 한 잔씩 기울이기도 했다. 융(Dung)은 별로 말이 없는 직원이었다. 술을 마시면 금방 얼굴이 붉어지곤 했지만, 그래도 맥주를 한 캔씩 마시면, 부인과 어린 자녀가 보고 싶다고 말을 하곤 했었다. 그의 어린 딸은 장애가 있다. 또 그는 노모를 부양해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다. 그는 술을 마시면 붉어진 얼굴로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주말엔 공장의 공터에서 생산부 직원 중 한 명이 다른 직원들의 머리를 잘라주었다. 거의 군대에 다시 온 것 같은 생활이 이어졌다. 그 옆 공터에서는 심심한 다른 직원들을 위해 만들어진 텃밭에서 키우기 쉬운 채소가 길러졌고, 그 뒤로는 창고를 배경으로 축구장을 만들어 다 함께 축구를 하기도 했다. 융(Dung)은 축구를 좋아하던 직원으로 기억된다. 일이 끝나면, 다른 직원들과 함께 웃통을 벗고 땀을 뻘뻘 흘리며 축구를 하곤 했다.


코로나19로 인한 봉쇄가 풀리고, 그는 같은 부서의 팀원인 르엉(Luong)을 데리고 내 방에 들어왔다. 코로나 기간 중에 쉬지 않고 변호사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칭찬하며, 앞으로 한 달 뒤에 있는 변호사 자격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휴가를 주면 감사하겠다는 설명을 했다. 그리고 얼마 전 악성 채권을 회수하는데 르엉(Luong) 이 큰 성과를 냈다면서 자랑을 하기도 했다. 나에게 자신의 휴대폰에 있는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거래처 채권을 회수할 때 온몸에 문신이 되어있는 깡패 같은 사람을 함께 데려가서 돈을 받아냈다며 르엉(Luong)을 치켜세웠다.


난 회사에서 이런 식으로 일을 하면 문제가 될 수 있으니 다시는 이렇게 처리하지 말라고 나무랐는데, 칭찬을 받을 줄 알았다가 무안해하면서 이 문신을 한 사람이 거래처를 직접 위협한 것은 아니고 운전기사로만 동행하였다는 설명을 덧붙이며 내 방을 나간 적이 있기도 했다.


결국 르엉(Luong)은 변호사 시험에 합격을 했고, 나는 이를 축하하며 급여를 올려주었다. 무언가 더 좋은 회사가 되어가는 것 같다고 생각을 했다. 충성도 높은 직원이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고 계속 근무하겠다고 했다. 그는 사내 변호사로 2-3년간 근무하다가 나중에는 시내의 법무법인에 들어가 상사 전문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코로나로 인해 지역 간 이동이 금지되고, 우편물 취급이 중단되기도 하였다. 그러고 나서 한꺼번에 거의 1년 치의 서류가 회사로 쏟아져 들어왔다. 대부분은 거래 개설, 거래 조건 변경, 채권 확인 서류들이다. 영업부에 그냥 놔두면 일이 빠르게 이뤄지지 않고 놓치게 되는 서류들이 많을 것이기에 법률팀이 영업부를 독촉해 서류를 받고, 이를 모아 나에게 가져오라고 지시해 두었다.


"이번에는 신규 거래개설과 거래 조건 변경 서류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한 번에 100장 가량의 서류에 서명을 받는다. 또 "이번에는 채권 금액 확인하는 서류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또 한 번에 몇 백 장의 서류에 서명을 받는다. 코로나 이후 그들은 이런 식으로 나에게 많은 서명을 받아갔다. 대부분 회사가 거래 형식상 갖추어야 하는 서류들이었다.


그리고 문제가 생겼다. 법원에서 받아본 판결문과 첨부서류의 내용을 보니, 모든 서류에는 내 서명이 A4용지의 오른쪽 가장 상단에 되어있었다. 그리고 뒷면에는 내가 그들에게 성과급을 주겠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 이렇게 한 장짜리 서류들이 여럿 나왔다. 아마도 일반적인 다른 서류에 사인을 받으면서 결재 서류의 제일 마지막 장 오른쪽 상단에 서명을 받은 뒤, 내 서명이 남아있는 용지의 뒷면에 성과급에 대한 내용을 추가로 인쇄하는 방식을 사용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이 서명들이 내 것이 맞다면 말이다.


금액부터 황당한 숫자이지만, 내부 규정상으로도 말이 안 되는 사실상 가짜 서류이고, 급여 관련 분쟁 시에는 노조와 먼저 협의한다는 회사의 내규 또한 위반한 사례이다.


그런데 회사도 모르는 사이에 1심 판결이 끝나버렸다. 그것도 한 달도 되지 않는 기간에 말이다. 정확히 26일이 걸렸다.


"빌어먹을, 제대로 당했다." 지난 수년 간의 기억, 이들을 면접했을 당시부터 코로나 기간 같이 지내던 기억들. 변호사 시험을 보겠다고 내 방에 들어왔던 날,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에 위로해 주던 저녁들. 모든 나의 믿음에 분노가 치밀었다. 이들은 믿음을 기반으로 사기 칠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언제부터 일까? 면접 보던 날부터 준비한 것일까? 나에게 딸의 장애를 말하던 날은 이런 계획을 세운 후였을까? 노모를 걱정하던 밤에 하던 말은 모두 가식이었던 것일까? 아니다, 채권을 받으러 깡패를 데려갔던 날에 알아챘어야 했나? 설마 이들 둘이서만 한 짓일까? 내부에 조력자가 더 있지는 않을까?


이제 누구에게도 믿음을 줄 수 없을 것 같았고, 이래서 사람들이 죽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 정신과 마음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심장이 아프고, 가슴이 무겁다. 잠을 잘 수도, 무엇을 먹을 수도 없었다. 이전의 대상포진이 다시 욱신거렸다.


내가 베트남에 계속 있어야 하는 것인가? 이 상태로 내가 여기서 계속 일을 할 수 있을까? 한국에 가고 싶다. 회사를 그만둬도 좋으니 그저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냥 한적한 등산로를 따라 계곡을 걷기만 해도 좋을 것 같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나오는 휴게소에 들러 커피 한잔 마시면 좋겠다. 그 새벽의 찬 공기에 기지개 펴며 차에서 내리던 내가 그립다.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그 때로, 그 곳으로. 여기는 싫다. 무엇보다 난 이제 여기 직원들을 믿지 못하겠다. 진짜 이곳의 밑바닥까지 다 확인한 것만 같다.


"어쩌면 아빠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어. 너희는 어떻게 생각해? 전에 너희들 한국 가고 싶다고 했잖아." 저녁을 먹으며 두 아들에게 말을 꺼내 본다.

"왜? 일하는 게 힘들어?" 숟가락을 들고 잠시 생각하던 첫째가 말했다.

"응. 회사 직원이 아빠를 속였는데, 너무 힘들다."

"그러면 여기서 회사를 바꾸면 되지 않아? 다른 회사로 가면 되잖아. 여기서도 일할 데 많잖아." 중학생인 첫째 녀석이 자기 생각을 얘기한다. 어쨌든 본인은 여기 남고 싶다는 말이다.


"넌 어때?" 옆에 앉은 둘째에게 물었다.

"나도 지금 갑자기 한국으로 학교 옮기면, 적응이 좀 어려울 것 같은데. 아빠가 그냥 여기서 남아있으면 좋겠어." 초등학생 둘째도 첫째와 같은 취지의 대답이다.

그래, 누구나 자기 처지에서 생각하기 마련이고, 자기가 이해하는 만큼의 반응을 보이기 마련이다. 나는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여보, 당신은 내가 한국으로 가면 어떨 것 같아?" 저녁식사 후에 잠자리에 누워 와이프에게 물었다.

"왜? 이번에 생긴 일 때문에 그래? 힘들지? 애들이 아까 한 얘기는 너무 서운해하지 마. 오히려 애들이 아빠 걱정해 준다고 애늙은이처럼 하는 것보다는 그냥 애들스러운 게 나은 것 같아."

"그래. 애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나도 뭐 꼭 한국에 가겠다는 건 아니고."


"아니, 맞다. 갑자기 요즘에 어떤 헤드헌터한테 연락이 오더라. 서울에 일자리 있다고 하는데 내가 연봉 많이 불렀거든. 근데 그 헤드헌터 얘기로는 그 정도는 불러도 괜찮을 것 같대."

"내가 볼 땐 지금 잘하고 있는 것 같아. 나 같았으면 벌써 무너졌을 텐데, 이 정도로 대응하고 있으면 잘하고 있는 거야. 이번일 마무리되면 한국에 휴가 좀 다녀와. 좀 쉬는 게 좋을 것 같긴 해."

"그래. 휴가 한번 다녀오자. 근데, 이번 일이 잘 풀릴지 모르겠어. 휴... 모르겠다. 아니야, 잘 풀리겠지."

"잘 풀릴 거야. 기도할게."

"그렇지? 그래."


나도 눈을 감고 기도를 해본다. 내 기도는 우리 아이들이 내게 하는 요청과 무엇이 다를까? 어차피 나도 내가 이해하는 정도에서 하는 기도일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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