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 혹은 또 다른 전쟁의 시작. 출근길에 머리가 복잡했다. 사이공 강 위의 높은 푸미(Phu My) 다리를 넘어가는데, 언제나처럼 쨍하게 비추던 햇빛이 없다. 늘 올리고 다니던 창문의 검은 블라인드를 내려본다. 흐릿한 구름들이 잔뜩 떠 있는 모습이 곧 비가 올 모양이다.
잠을 잘 수가 없고, 복잡하기만 한 머리를 진정시키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스마트폰 켜서 유튜브를 실행시킨다. 온통 찬송가, 설교, 우울증에 대한 동영상만 떠있다. 나는 조용히 찬송가를 재생했다. 3곡쯤 지나갔을 때, 지난주에 들었던 노래가 또다시 나온다. 청년시절에 알고 지내던 목사님의 목소리다. 카카오톡의 친구 검색을 해보니, 아직 그 목사님의 연락처가 저장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만났던 게 언제더라? 10년 이상 된 것은 확실하다. 목사님의 노래가 위로가 된다며 안부를 묻는 문자를 보냈다. 해외 생활이 어려울 텐데 어떻게 지내고 있는 중이냐는 답장이 왔다. 그는 내가 해외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냥 그 문자에 눈물이 났다. 나는 다음에 다시 연락드리겠다고 답장을 보내고는 스마트폰을 닫았다. 창밖으로는 조금 전의 오토바이 무리가 사라지고 초록의 풀과 나무들이 길을 따라 펼쳐진다.
재심 청구서에 붙여야 하는 첨부 서류들이 많았다. 특히 1심 법원에서 서류 복사를 하는데 애먹게 만들어서 시간이 더욱 걸렸다. 최고 인민 법원은 오후 5시까지 근무한다고 한다. 게이트 로펌의 짱(Trang) 변호사는 청구서를 작성하여 점심 무렵부터 법원에서 기다리고 있다며 연락이 왔고, 회사에서는 오후 3시에 변호사가 요청한 모든 첨부 서류를 준비하여 법원으로 출발했다. 나와 통역 직원 투(Thu)가 함께 출발했는데, 회사에서 법원까지는 1시간이 조금 넘게 걸린다.
회사에서 출발한 지 10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부터 하늘이 어둑어둑해지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곧 우기가 시작될 것같이 계속 구름이 많더니 드디어 시작됐나 보다. 베트남 남부의 우기에는 우산이 필요 없을 정도로 비가 쏟아진다. 정말 아무도 우산을 쓰지 않는다. 막는다고 막아지는 정도의 것이 아니고, 어차피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도로는 금방 냇물이 된 것처럼 물이 가득 차버렸고, 차들이 멈추기 시작한다.
"우리 늦는 거 아니니?" 통역 직원 투(Thu)한테 물었다.
"비가 와서 늦을 것 같긴 한데... 최대한 빨리 가보겠습니다."
"변호사한테 미리 연락해 놔. 조금 늦을 수도 있다고. 그리고 우리 가는 법원은 어딘지 잘 아는 거지?"
"네. 다 알고 있습니다. 운전기사한테도 주소 잘 전달했고요. 짱(Trang) 변호사한테도 연락하겠습니다."
"오늘을 잘 막아야지. 우리도 당분간만 좀 고생하자. 잘 풀릴 거야."
"네. 법인장님. 법인장님도 힘드시죠? 저는 어제 집에서 벽을 치면서 울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나쁜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조수석에 앉은 통역 직원 투(Thu)는 나와 함께 6년째 일을 하고 있다. 호치민대학교 한국어과를 나온 남자 직원 직원인데, 이제 40대 초반으로 늘 나와 출장을 함께하는 회사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직원이다.
이 직원은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한국에서도 잠깐 근무했던 적이 있다. 경기도 포천 어딘가에서 근무했다고 하면서 눈이 그렇게 많이 오고 너무 추웠다는 한국에서의 추억을 얘기하기도 한다. 나도 포천에서 군 생활을 해봐서 눈이 얼마나 많이 오는지 알고 있다고 함께 맞장구 쳐주면 좋아하는 직원이기도 하다. 그리고 베트남으로 돌아와 계속해서 한국회사만 다니며 근무를 하고 있는, 한국어를 잘하는 직원이다.
한국이 좋은데, 그동안 다니던 한국회사의 사장님들은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안전모에 뒤통수를 맞아 피가 났던 적도 있고, 말 끝마다 욕을 하던 어떤 사장님 밑에서는 견딜 수 없어 퇴사했던 경험도 있었다고 출장 다니며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했던 직원이다.
"응. 그래 고마워. 이 녀석들은 정말 혼을 내줘야 되겠어."
"네.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꼭 감옥에 보내야 합니다."
"그래. 그러자."
"그리고 베트남 사람으로서 정말 죄송합니다. 법인장님이 그 녀석들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이렇게 행동을 할 수 있는 건가요? 전 정말 화가 납니다. 화가 나는 정도가 아니라, 잠을 자려고 누우면, 이 녀석들이 제 귀에다가 계속 떠들며 웃는 소리가 들려서 밤새 잠을 잘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체력 떨어지면 안 돼. 마음 강하게 하고, 푹 자도록 해."
"그래도 잠이 들지 않습니다. 대표님. 너무 억울한 생각만 듭니다. 이 회사를 어떻게 키워내고 있었는데, 저와 다른 직원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투(Thu)가 앞자리에서 계속 얘기하고 있는 것처럼, 사실은 나도 그랬다. 지난 며칠간 잠을 잘 수도, 뭔가 먹을 수도 없었다.
"기도하자.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 있겠니?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보여달라고 기도하자. 요즘 난, 가만히 있어도 기도하게 되네. 그동안은 이렇게까지 간절했던 적이 없었는데, 요즘은 자꾸 기도하게 돼."
"네. 저도 부처님한테 매일 기도하고 있습니다. 잘 해결되게 해달라고 저도 매일 기도하고 있어요."
폭우가 쏟아지는 오후, 도로는 물로 가득 차 있고, 비가 오고 있는 차창 밖은 어두 컴컴하다. 시간은 이제 오후 4시 30분. 법원 문 닫을 시간이 30분 남은 시간, 불안했지만 우리는 법원에 도착했다.
"뭐야? 법원 불이 꺼져 있는 것 같은데? 문도 닫혀있잖아?" 정말 법원의 철문이 닫혀 있고, 불도 꺼져 있었다. 비가 와서 일찍 닫았나? 아니면 우리가 법원 운영시간을 잘 못 알고 온 건가? 법원에 불은 왜 꺼져 있는 거지? 온갖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창밖으로 비가 쏟아진다. 와이퍼가 미친 듯이 흔들리고, 차창에 들이치는 빗방울은 소리로도 우리를 뒤흔들고 있다.
"변호사가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습니다. 연락해 볼게요." 투(Thu)가 전화를 걸며 말한다. 비가 자동차 지붕을 때리는 소리가 크게 나서 투(Thu)도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변호사는 어디에 있다는 거야?" 나도 목소리를 키우며 크게 물었다.
"법원에 있다고 합니다. 법원에 다른 문이 있는 것 같아요." 투(Thu)는 변호사와 통화를 마치고 대답을 했다. 차를 몰아 법원 담을 돌고 있는데 도대체 다른 문이 보이질 않는다. 법원 한 바퀴를 다 돌았다. 어둡기도 하고 비가 너무 많이 내려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비 소리가 자꾸 시끄럽다.
"아! 법인장님 저쪽에 열린 문이 있습니다." 운전기사와 계속 이야기하던 투(Thu)가 뒤를 돌아 나를 쳐다보며 말한다.
"어! 그래! 빨리 가자." 우리가 도착한 방향이 아닌 다른 쪽에 차 한 대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쪽문 하나만 열려 있었다. 4시 40분. 이제 법원의 마감 시간까지는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법원의 현관에 서있던 게이트 로펌의 짱(Trang) 변호사는 청바지에 두꺼운 아이보리색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법원 지붕의 처마에서 떨어지는 비에 맞아 옷의 반은 어둡게 젖어 있는 상태였다. 회사에서 가지고 온 첨부서류를 짱(Trang) 변호사에게 전달하고, 우리는 함께 법원 2층의 접수실로 이동했다. 이제 나와 투(Thu)는 접수실 앞 복도에서 기다리고, 변호사는 접수실 안으로 들어갔다.
약 5분 정도 시간이 지나고, 접수실에서 어떤 남자의 큰 목소리가 들린다. 아무래도 우리 변호사를 야단치는 듯한 상황이다. 긴장되어 복도의 철제 의자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일어서서 눈을 감고 또다시 기도했다. '제발 우리 재심 청구 서류가 잘 접수되게 해 주세요.'
그렇게 10분 정도가 흐르고 짱(Trang) 변호사가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나에게 접수증을 건네면서 웃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난 변호사의 손을 꽉 쥐었다.
"걱정 마세요." 짱(Trang)이 드디어 말을 건넸다.
나는 변호사의 머리 위에 내 백팩을 올리고는 그녀 옆에 서서 비가 한참 쏟아지는 법원 현관의 계단을 함께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차장에 있는 그녀의 차까지 바래다주었다. 내 옷과 내 가방은 흥건하게 젖었지만, 나는 짱(Trang) 변호사에게 손을 흔들며 웃어주었다.
오늘은 그렇게, 내가 가진 힘으로 누군가의 머리 위에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