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늘, 베트남의 여러 로컬 로펌과 연락하고 베트남에서 활동 중인 한국 로펌들도 연락해 보았다. 이미 1심 판결이 났고, 확정되어 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이 사건이 어렵다고 한다. 그 중에 이런 사건을 해결해 보았다는 베트남의 한 로펌에서 조언하기로는, 무슨 방법을 사용하든지 간에 우선은 자금이 인출되는 것을 막아야 하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손을 써봐야 하지 않겠냐고 한다. 그 로펌의 변호사는 이번 주말 내내 청구서를 작성하여 월요일에 재심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해보겠다고 했고, 계약은 그 뒤에 하자고 한다.
감사한 연락이다. 일단 회사는 자금의 인출을 막아야 한다. 그 로펌은 회사 내부의 서류를 제공하고 판결문을 가져오면 월요일까지 재심 청구서를 작성해 주기로 했다. 회사도 법원에 다녀온 어제부터 오늘까지 여러 변호사들을 만나고 사건의 내용을 빠르게 파악했다. 그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미 1심 판결이 났고, 또 항소 기간이 만료된 상태이므로 회사는 호치민의 최고 인민 법원에 1심 판결에 대한 재심을 청구해야 한다.
회사는 빨리 손을 써서 다음 주 화요일로 예정된 자금의 인출을 막아야 한다. 막지 못하면 돈은 그 사기꾼들에게 넘어간다. 곧바로 로컬 법무법인의 변호사를 만났다. 이 변호사는 제대로 된 변호사 사무실이 없어서 호치민 시내의 한 공유 오피스로 우리를 불렀다.
"게이트(Gate) 로펌의 대표 변호사 짱(Trang)입니다." 나는 건물 1층에 있는 무거운 유리문을 열고, 좁은 계단을 올라 2층 공유 오피스 회의실에 앉은 짱(Trang) 변호사를 만났다.
"변호사님, 너무 감사합니다." 3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베트남 여자 변호사 짱(Trang)에게 감사하다며 인사를 했다.
"일단 급하니까 재심 청구서를 먼저 써 볼게요. 소송 계약은 그다음에 하시죠. 이런 비슷한 사건을 다뤄본 적이 있습니다. 외국 사장님들을 속여먹는 나쁜 직원들이 종종 있어요. 전에 맡아봤던 것은 한 독일회사의 독일인 법인장이었는데, 직원이 회사 건물을 본인에게 증여한다는 계약서를 몰래 작성했었어요. 그리고는 베트남어를 잘 못하는 법인장한테 다른 서류를 결재 받는 것처럼 속여서 사인을 받았죠. 중간에 돈이 좀 들긴 했지만, 결국에는 회사 측이 승소했습니다." 나는 어떤 희망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빨리 서류를 보내겠으니 바로 이번 사건에 착수해 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그리고 베트남에 오래 근무하셨다니까 아시겠지만, 베트남에서 공무원과 일할 때는 검은 돈이 조금 들긴 해요." 검은색 정장 바지에 얇은 흰 블라우스를 입은 짱(Trang) 변호사는 살짝 머뭇거리며 뒷돈이 들어갈 것이라 얘기했지만, 나도 그럴 것이라고 짐작하고는 있었다.
"감사합니다. 변호사님 덕분에 월요일에 재심사 청구서를 접수하고 자금 인출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도 뒷돈이 든다는 건 각오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변호사님께서 비슷한 사건을 경험하셨다는 얘기를 들으니 정말 안심이 됩니다.” 나는 그녀에게 악수를 청했다.
“네. 월요일까지 이상 없이 재심 청구서를 작성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첨부 서류들은 가능한 한 빨리 준비해 주세요.” 잠시 서류를 정리하고 일어서던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하나 질문이 있습니다. 그 사기 친 직원, 왜 빈 서류 봉투를 자기 집으로 보냈을까요?” 나는 미팅을 종료하려는 그녀에게 궁금하던 이 사건에 대해 물었다.
"저도 생각해 봤는데, 아마 본인이 집에 가지고 있는 어떤 서류를 그 안에 넣으려고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회사에서 본인에게 유리한 어떤 서류를 자기 집으로 보내줬다.'라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짱(Trang) 변호사가 그저 자기의 추측이라고 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다는 거네요?" 짱(Trang) 변호사의 말이 일리가 있어 보인다.
"네. 저희도 잘 대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상대방도 법률 전문 가고, 지방법원 판사도 이 사건에 끼어 있을 확률이 높은 사건이라서 법적 대응을 철저히 해야 할 것 같아요. 지방의 나쁜 법조인들이 단체로 뭉쳤을 수도 있습니다. 저도 법원에 연줄을 대서 사건을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우선 지금까지 파악된 내용을 바탕으로 한국 본사에 알려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동안 본사와 여러 마찰이 있어왔다. 그래도 베트남 법인의 실적이 계속해서 개선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나는 내 주장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중이었다. 최근에는 현지에 더 자율권을 주고 맡겨달라는 얘기를 하는 중이었는데, 곤란하게 됐다. 곤란한 정도가 아니라 회사를 철수할 수도, 아니면 내가 빠져야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차라리 내가 빠지면서 회사를 살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런 피해가 없다면 내가 빠지는 게 낫다. 불안함에 마음이 떨린다. '나가라고 하면 재심 청구까지는 해 놓고 나가겠다고 하자.'
잠을 잘 수도, 식사를 제대로 할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이 의심스럽고, 온통 불안하기만 하다. 사무실에 앉아 물을 한잔 마신다. 혹시 회사에 그 사기꾼들이 다시 들어와서 어떤 서류를 가져가거나, 내부의 동조자가 사무실에 나와서 협력할 정보들을 찾아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주말이지만 다른 직원들 몰래 운전기사만 불러 사무실에 나와 앉아 있다. 불 꺼진 사무실은 서늘했다. 한 낮이지만, 창 밖의 구름도 어둡기만 하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한국 본사에 전화를 건다.
"상무님. 베트남 법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러지 않으려 했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한번 떨린 뒤에는 진정되지 않는다. "왜? 무슨 일인데 목소리가 떨려? 심각한 거야?" 그는 내 목소리에서 뭔가 심각함을 감지한 것 같다. 늘 하던 농담으로 대꾸하지 않고 진지한 대꾸를 했다.
나와 한국에서 10년 이상 사무실 앞뒤에 앉아 근무하던 선후배 사이다. 처음에는 사원과 대리로 만나 여러 일을 함께 했다. 같이 흡연실에 나가 담배를 피우며 윗사람이나 회사에 대한 불평을 나누기도 하던 형동생 같은 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전히 한국에 들어가면 꼭 만나서 술 한잔씩 하는 사이다.
"네, 상무님 심각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잠시 헛기침을 하며 뜸을 들여야만 했다. 그 뒤의 말이 잘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가, 믿었던, 직원에게 당했습니다." 하기 싫은 말을 억지로 토하듯 말을 끄집어냈다. 눈이 붉어진다. 그리고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데 아무 이유 없이 목이 메어온다. 그 다음 말을 이어가야 하는데 잘 나오지 않았다.
신입사원 시절, 사무실에서 혼나고 미안하다고 말하며 저녁에 술 한잔 하던 예전 일들이 생각난다. '그저 그런 정도의 일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대리부터 부장까지의 진급에 함께 좋아하고 진급 누락에 서로 위로하던 예전의 그러한 날들도 생각이 난다. 난 마음을 진정시키고 천천히 이 사건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임 법인장. 잘 들어. 여기서 네가 흐트러지면 정말 회사 큰일 나는 거야. 네가 제일 중요해. 그러니까 정신 차려야 돼. 알겠어?" 그는 내가 기대했던 말과는 다른 말을 했다.
"네. 그냥 상무님 목소리 들으니까 목이 메어서 말이 잘 안 나오네요. 죄송하지만, 직원들과, 어쨌든, 잘 풀어가고 있습니다." 헛기침을 해대며 겨우 말을 마쳤다. 그래 겨우 겨우 어떻게든 풀어가고 있는 중이다.
"응. 그래. 회사에서 이런 일 일어날 수도 있는 거야. 그렇잖아. 한국에서도 여러 어려운 일 잘 풀어냈었잖아. 이것도 잘 풀면 되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 일단 월요일에 청구서 접수해야 된다면서? 그것 먼저 하자. 대표님한테는 내가 먼저 얘기해 놓을 테니까 이따 통화해."
"네, 감사합니다." 통화를 끝낸 후엔 후련함과 함께 더욱 먹먹해진 마음으로 슬퍼졌다.
한 시간 정도 후에는 한국에 있는 대표이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임 법인장. 대충 얘기 들었어. 해결하고 있다면서?"
"네, 지금 해결하고 있습니다.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사기 친 놈이 나쁜 거지, 당한 사람이 뭔 죄냐? 잘 수습하면 되는 거야. 나도 예전에 거래처에 사기당해서 난리 났던 적이 있었어. 당황하지 말고 힘 내봐. 원래 윗자리에 있으면 이런 일, 저런 일 다 당해보고 또 해결도 해보고 그러는 거야. 그리고 오너한테는 내가 간단히 보고했어. 바로 전화하겠다고 하시는데, 오늘은 하지 말고 다음에 상황이 조금 안정되면 연락하시라고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일단 막아놓고 얘기하자."
"네, 너무 감사합니다. 대표님. 재심 청구서 준비해서 제출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일단 돈이 나가는 것부터 막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그러다 갑자기 이런 생각도 든다. '이길 수 있을까?', '이 녀석들은 얼마큼 준비를 한 상태일까?', '아, 그냥 다 그만두고 그냥 한국으로 돌아갈까?'
아니다. 한국의 경영진들이 날 믿어주겠다고 한다. 사건이 잘 수습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계산된 표현을 했을 수도 있지만, 아무러면 어떤가? 조금 전 나는 퇴사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일단은 사건을 수습한 후에 생각해 보기로 한다. 재심 청구까지는 마무리 지어보자.
내가 열지 않으려던 문이지만, 지금 문이 열렸다. 이제껏 문이 열리면 늘 기회도 있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