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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작할 수 없는 일

by 맑은돌

법원에서 사무실로 돌아와 차가운 물을 한 잔 마셨다. 목이 많이 타는지 오늘 물을 너무 많이 마시고 있다. 벌써 작은 플라스틱 병에 들어있는 생수를 다섯 개째 비우는 중이다. 내 사무실의 의자에 앉아 멍하니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결재할 서류들을 읽고 있다. 그저 글자만 읽을 뿐 해석되지는 않는다. 그러는 사이, 아까 우체국으로 나갔던 총무 매니저 로안(Loan)이 한 서류 봉투를 들고 급하게 내 방으로 들어왔다. "대표님, 법률팀 매니저 융(Dung)이 등기로 보냈던 서류를 찾아왔습니다."


총무 매니저 로안(Loan)은 나와 동갑의 여자 매니저이다. 벌써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서류를 볼 때면 돋보기를 써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통통한 체격에 따뜻한 니트를 입고 앉아 있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이런 분위기의 그녀는 정이 많다. 그래서 그런지 직원들과 면담을 자주 하고, 나에게도 직원들의 이야기를 종종 전한다. 얼마 전에는 베트남의 최대 명절 뗏(Tet, 구정)이 있었다. 보통 일주일 정도를 쉬는 긴 휴일을 보내느라 다들 고향에 방문하는데, 베트남의 회사는 이 뗏(Tet)에 맞춰 직원들에게 보너스를 주는 것이 관행이다.


"대표님은 왜 뗏(Tet) 보너스 안 받으시나요?" 로안(Loan)이 결재서류를 들고 와서는 내 책상 앞에 서서 얘기했다. "나는 한국 본사에서 나올 거야. 여기서는 신경 안 써도 돼." 난 파란색 볼펜을 들고 보너스 지급 서류에 서명을 하며 대답했다. "그래도 받으셔야 해요. 지난해에 실적도 많이 개선됐잖아요. 대표님이 제일 고생하신 건데, 왜 여기서 보너스를 안 받으세요? 그전 해에도 안 받으셨잖아요? 이번에도 대표님이 안 받으시면, 저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니야. 로안(Loan)이 이해를 잘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와 여기 현지의 베트남 직원들은 급여 체계가 달라. 난 한국 본사에서 따로 책정해서 받을 거니까 괜찮아. 신경 써줘서 고마워." 로안(Loan)은 뭐가 그리 의심스러운지 내가 서명한 보너스 지급 서류를 결재판 커버로 덮고 나서도 한동안 책상 앞에서 머뭇거렸다.


총무 매니저 로안(Loan)은 이렇게 따뜻하고 여유 있는 사람이다. 그런 그녀가 우편물을 들고 내 방에 노크도 없이 급하게 문을 열며 들어와 보고를 한다. "대표님, 법률팀 매니저 융(Dung)이 등기로 보냈던 서류를 찾아왔습니다."


"어. 잘했어. 그래도 다행히 아직 우체국에 남아있었네. 내용이 뭐야? 무슨 서류를 보낸 거야?" 어떤 반전의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찬 나는 희망을 조금 싣고서 질문했다. "대표님. 그게..." 그녀는 잠시 대답을 머뭇거렸고, 나의 희망도 머뭇거렸다. "대표님, 내용물이 없는 빈 봉투인 것 같습니다." 그녀는 회사의 붉은색 로고가 찍힌 하얀 서류 봉투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 천장의 LED 조명에 봉투를 비춰보니 정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것 같았다. 풀로 붙인 봉투의 입구를 뜯었다. 봉투에는 아무런 내용물이 들어있지 않았다.


"이게 뭐지? 융(Dung) 이 녀석은 왜 빈 봉투를 자기 집으로 보냈지?" 무언가 크게 당한 느낌이다. 빈 봉투처럼, 이 사건도 허무하게 나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치밀하게 준비한 것 같아요. 의도를 짐작할 수 없습니다. 대표님, 저희도 준비를 많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총무 매니저 로안(Loan)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 책상에 빈 봉투를 내려놓았다.


'만만치 않겠다.' 왠지 조짐이 좋지 않았다.


오늘 오전 법원에 다녀온 이후, 여러 변호사 사무실에 전화를 하고 사건의 내용을 상담해 봤다. 이미 1심 판결이 확정되어 어려울 것 같다는 얘기가 주된 의견들이지만, 판결 내용 자체가 너무 이상하기 때문에 한번 싸워볼 만하다는 얘기도 들었다.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다. 회사의 다른 베트남 매니저들도 이와 유사한 사건을 해결해 본 적이 있다고 하는 변호사 사무실을 방문하고 있다. 또 상급 법원의 아는 판사가 소개해줬다는 변호사들의 연락처도 받아 전화를 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사무실의 관리 직원들 모두가 분주하다. 사기를 친 법률팀 직원 2명은 1심 판결이 나고 확정이 될 때까지 회사에 다니며 법원에서 온 모든 서류의 수령자를 본인들로 해놨다. 이렇게 회사와 나는 2심 법원에 항소할 수 있는 기간이 지나버린 상태에서 이 사건을 알게 되었다.


마음이 무너진다. 융(Dung)과 르엉(Luong)이라는 직원들은 내가 회사의 모든 서류를 검토하라고 지시한 법률팀의 팀장과 팀원이다. 팀장인 융(Dung)은 베트남 대기업에서 법률 업무를 경험한 경력사원이었고, 코로나 기간 중에는 나와 함께 공장에서 숙식하며 본인의 가정 얘기를 하기도 하면서 서로 마음을 나누던 착실한 30대 후반의 가장이었다. 또 한국을 좋아해서 늘 한국어 공부를 하던 팀원인 변호사 르엉(Luong)은 내가 회사를 다니며 변호사 자격을 딸 수 있도록 지원까지 해준, 이제 갓 서른 살의 젊은 청년이다. 둘 다 내가 믿는 직원이기에 내 방 바로 옆에 책상을 두고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근무했던 직원들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이렇게 오늘, 갑자기 은행에 있는 회사돈이 묶여버렸다. 회사가 무너질 수도 있는 금액인 것이다. 변호사와 상의하고 정확한 판결과 사건의 내용을 파악한 뒤에 한국 본사에 알려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다. 본사에 알리긴 해야 되는데 아직 나도 내용 파악이 분명치 않다. 두렵다. 또 용기가 나지 않는다. '괜찮을까? 모든 것이 무너지는 건 아닐까?'


무섭고 또 마음이 무겁지만, 퇴근을 하려 사무실에서 나왔다. 사무동의 현관 앞에 대기하고 있는 검은색 카니발 너머로 공장동 건물이 보인다. 공장 한쪽에서 제품을 싣고 있는 커다란 트럭들의 모습이 분주하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하늘을 본다. 트럭들 사이로는 저녁 빛이 스며들고 있고, 저 멀리 어둑한 구름이 내려앉는다. 이제 검은색 카니발의 뒷문이 열리고 옅은 브라운 계열의 가죽시트가 보인다. 일단 저기에 앉아 생각을 정리해봐야 할 것 같다. 내 옆자리에 검정 백팩을 던져 넣고 자리에 앉자, 운전기사가 뒤를 흘끔 돌아본다. "집으로 가자."


한국계 법무법인의 변호사와 통화하며 집으로 향하는 길. 차 창밖 시골의 풍경은 온통 녹색이다. 수없이 많은 녹색의 풀과 나무가 지나가고, 시간이 지나 도시가 가까워지면서 부터는 오토바이가 물고기 떼처럼 등장한다. 이들은 내 자동차를 삼켜버릴 것처럼 사방을 빙 둘러싼다. 이런 광경은 이제 익숙한 것이다. 벌써 7년이 지났다. 이 낯선 땅 베트남에 와서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이번 일이 가장 심각하다.


지난 일들이 생각난다. 판매가 없어 회사의 경비실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경비들에게 베트남 말을 건네보던 7년 전의 초창기 일도 생각나고, 거래처가 총을 들고 회사로 찾아왔던 날, 중요한 생산을 앞두고 용역이 파업을 하던 날, 코로나 기간 동안 직원들과 공장에서 함께 지내던 날들이 생각난다. 또 이달 말에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에서 받게 될, 베트남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회사라는 타이틀을 뿌듯하게 생각하며 직원에게 비행기 표 티켓팅을 지시하던 어제 낮의 일도 생각난다. 그래, 바로 어제 오후에는 상 받으러 가는 하노이 출장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줄도 모르고 무언가 이루는 것만 같았었지.' 그러던 내가 바보 같기만 했다.


집까지는 1시간 30분가량 걸린다. 집으로 돌아가며 아까 법원에서 읽던 성경책을 조금 더 읽는다. 날이 어둑해지고 글자 읽기가 불편해지면서 찬송가를 듣자고 생각했다. 차 안에서 정말 오랜만에 찬송가를 듣는다. 어쩌면 오늘이 베트남에 와서 통근길에 찬송가를 듣는 첫 번째 날인 것 같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에 따라 나오는 찬송 중에 20년 전쯤에 알고 지내던 한 목사님의 목소리가 섞여 있다. 그분께 위로 받는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이번 사건이 잘 마무리되면 한번 연락을 드려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다.


비가 잔뜩 내릴 것 같은 회색 구름이 보이고, 빌딩 사이에 가려진 태양이 보인다. 매일같이 사이공강을 넘는 통근길이 오늘은 많이 어둡고 무겁다. 서글픈 느낌도 든다. 그리고 눈물이 흘렀다. 눈물을 멈추려 하면 가슴이 너무 떨렸다. 차가 집 앞에 멈추고, 나는 눈물을 닦고서 미지근해진 생수병을 들고 차에서 내린다.


미지근해진 생수처럼 오늘 하루도 식어버렸지만, 아직 내일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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