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님, 늦은 시간까지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호치민 시내에 있는 한국계 로펌 광야에 도착해서 얼마 전부터 통화만 하던 한국인 변호사를 만났다. 175cm쯤 되는 날씬한 체격, 나와 비슷해 보였다. 또 나와 같이 어두운 색의 정장 바지에 흰 와이셔츠의 소매를 적당히 걷어 올리고 있다. 변호사는 로펌의 회의실에서 나를 만나 악수하며 반갑게 맞아줬다. 사건 이후 계속 베트남 사람들과 만나다가 처음으로 한국 사람을 만나 얘기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놓이는 것 같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몇 달 전, 호치민의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동갑내기 한국인 친구를 만났다. 이 친구는 나처럼 한국 회사의 베트남 법인에 일을 하러 나온 것이 아니라, 베트남에서 개인 사업을 하기 위해 나와있다. 5년 전쯤에 베트남에 나와서 지금은 호치민의 7군에 본인의 사업장을 열고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중이다.
"웬일로 먼저 만나자고 연락을 준거야?" 시내의 장어구이 집에 앉아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응. 어디서 양주를 한 병 받았는데, 혼자 먹으려니까 심심하잖아. 네 생각이 나서 불렀지." 얼마 전 거래처에서 선물로 받은 발렌타인 21년 산 위스키를 꺼냈다.
일반적인 중년 남자들이 나누는 얘기를 2시간가량 나누며 위스키를 절반 넘게 비웠고, 그렇게 한참을 근황에 대해 얘기하던 중에 그 친구가 최근에 지갑을 잃어버렸던 얘기를 꺼낸다. 지갑을 훔쳐간 녀석이 신용카드로 몇 백만 원어치를 긁어서 깜짝 놀라 정지시키고 베트남 공안에 접수했는데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고 했다. 공안에 몇 번씩 다니면서 똑같은 이야기를 진술하고, 또 본인의 분실된 카드가 긁힌 사업장에도 찾아가 봤는데 별 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그러다 한국 영사관 소속의 경찰 영사에게 연락을 할 수 있게 돼서 연락했더니 며칠 후에 베트남 공안에서 연락이 와서는 오늘 중으로 다 환불처리 되니까 확인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야! 여기가 이런 동네야. 뭔 압력이 있기 전까지는 아무런 액션이 없더라고." 친구가 그래도 다행이라는 듯 나에게 말하며 경찰 영사의 연락처를 나에게 보냈다. "아무튼 내가 너한테도 연락처 알려줄게. 혹시 급한 일 생기면 연락해 봐."
"응. 고마워. 급한 일 있을 때 연락하면 되겠네." 테이블 위에 반찬 그릇 옆에 놓아둔 내 갤럭시 스마트 폰으로 친구가 보낸 연락처가 들어온다.
"그런데, 일반적인 사건에는 상대국 법 체계를 존중하는 의미로 끼어들지 않는대. 특별한 일에만 낄 수 있나 봐."
"그렇겠지. 다 껴들면 서로 어떻게 일하겠냐? 아무튼 오케이. 고마워."
그리고 몇 달 뒤에 이번 사건이 터졌다. 나는 이번 사건이 터지자마자 바로 친구가 알려준 경찰 영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렵게 되셨네요. 그런데 아직 사건이 어느 부서로 정확하게 배정된 것이 아니라 제가 나서기가 어려운 것 같고요. 변호사 구하신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한번 알아봐서 가능하다고 하는 곳으로 추천해 드릴게요." 경찰 영사가 내 급한 요청에 대답해 주었다.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꼭 연락해 볼게요."
"네. 연락처 보내드릴게요. 저한테 소개받았다고 하시면 잘 안내해 주실 거예요. 저도 미리 연락해 놓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제 연락처는 어떻게 아신 거예요?" 경찰 영사가 나에게 물었다.
"아... 제가 워낙 사안이 급하다 보니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정신없이 알아봤습니다. 연락받아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네, 어쨌든 일이 잘 풀리시길 바랄게요."
이렇게 경찰 영사와 연락이 되고, 이를 통해 지금 만나는 한국 로펌 광야의 변호사와 연락을 할 수 있었다. 이 로펌에서는 이미 우리 사건을 검토하고 있는 중이었지만, 직접 만난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앉으시죠." 백 변호사가 회의실 문을 닫으며 말을 건넸다. 옆자리에는 광야 소속 베트남 여자 변호사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에게 명함을 건넨다. 베트남 변호사의 이름은 리우(Lieu). 전에 들어보기는 했지만 베트남에서 흔치 않은 이름이긴 했다.
"네. 감사합니다. 오늘 집행기관에서 너무 깜짝 놀라서요. 여기 오는 길에 한국 본사에도 보고하니까 보디가드를 한 명 채용하라고 하더라고요." 시내의 광야 로펌으로 오면서 전화로 한국 본사와 나눴던 얘기를 전했다.
"그러게요. 말씀 들어보니까 오늘 많이 놀라셨을 것 같아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얘네들이 왜 이렇게 서두르는지 모르겠네요." 백 변호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저도 사건을 알게 되자마자, 모든 상황이 너무 빠르게 전개되고 있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아, 그리고, 변호사님. 아까 저희 총무 매니저가 서명한 서류는 문제가 없을까요?"
"그것도 우리 변호사들하고 검토해 봤는데, 법인장님이 서명한 게 아니라서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아까 우리 총무 매니저도 엄청 걱정을 하고 있더라고요."
"많이 겁먹어서 그랬나 보죠. 그런데 말씀드렸듯이 집행기관이 이 사건을 이렇게 빨리 처리하지 않아도 되는 건데, 보통은 집행기관이 일을 너무 안 하려고 해서 빨리 처리해 달라고 민원이 들어가는 정도거든요. 왜 이렇게 빨리 처리하려고 하는지 저희도 의아하더라고요. 또, 저도 이 사건을 우리 로펌 변호사들과 검토해 봤는데, 이 녀석들 질이 나쁘네요. 시골 동네 법조인들이 다 껴서 한번 뭔가 해보려고 했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그리고 그 성과급 금액이라는 게 말도 안 되더라고요. 이게 어떻게 법원에서 지급 명령이 났느냐고 저희 변호사들과 리뷰하면서 웃었습니다. 다시 한번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해 주시겠어요?" 백 변호사는 차분한 말투로 나에게 사건의 처음부터 다시 설명을 요청했다.
설명하는 중간중간 목이 메고, 눈이 충혈됐다. 눈물이 맺힌다. 다시 그 직원들에 대한 설명을 하고 회사에서 사건을 알게 된 경위를 복기하고, 오늘까지의 진행경과를 얘기하는데 몸이 떨리고 가슴이 너무 무거웠다.
"법인장님. 진정하세요. 진정하시고 여기 물 한잔 드세요." 변호사는 내 앞에 있는 생수병의 뚜껑을 열며 조금 더 가깝게 밀어준다.
"네, 감사합니다. 이 사건을 다시 생각하면, 믿었던 직원들한테 사기당한 것도 그렇지만, 지금까지 성장시켰던 회사가 어떻게 될까 봐 불안하기도 하고, 또 날 믿고 같이 일해주고 있는 우리 직원들한테도 너무 미안하고 여러 감정이 다 올라옵니다." 충혈된 눈에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테이블 위에 있는 티슈를 한 장 뽑을까 말까 망설이며 변호사에게 내 감정을 얘기했다.
"법인장님. 지금은 많이 놀라셔서 그렇겠지만, 나중에 이거 생각해 보시면요 정말 아무것도 아닐 거예요. 지금 저희한테 의뢰 오는 사람들 중에 몇 백만 불, 몇 천만 불씩 거래 잘못하고 오시는 분들도 많고요. 오히려 그런 분들은 자기 잘못 아니라고 더 당당하신 분들도 많아요. 이건 법률팀 직원들이 사기 친 거잖아요. 걱정 마세요. 풀 수 있는 문제입니다."
"변호사님. 너무 감사합니다. 그런데 너무 속상해요. 사람에 대한 믿음도 없어져서 제가 정신병에 걸린 것 같기도 합니다. 요즘엔 매니저들을 다 같이 함께 불러서 업무 지시도 잘 못해요. 각각 불러서 얘기하고 어떨 때는 서로 다른 얘기를 일부러 하기도 해요.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은데, 어쨌든 지금 차분해지려고 많이 노력하고는 있습니다." 이때부터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테이블의 티슈를 몇 장 뽑아 눈물을 닦았다.
"법인장님. 솔직히 말해서 법인장님도 여기 현지법인의 주재원인 거잖아요. 여기서 잠깐 월급 받고 회사 다니시는 건데 뭐 그렇게 책임감을 많이 가지시는 거예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런 거 아무것도 아닙니다. 보니까 잠도 못 주무시는 것 같고, 너무 피곤해 보이시는데, 푹 주무시고, 일상생활도 좀 하시면서 대응하셔야 됩니다. 길게 보셔야 돼요. 1년이 넘을 수도 있고, 2년, 3년을 갈 수도 있는 싸움입니다. 길게 보세요."
"네. 그러려고 노력할게요. 감사합니다."
"이게 걱정한다고 해서 잘 풀리는 것도 아니고, 방치한다고 안 풀리는 것도 아닌 경우가 많아요. 너무 걱정 마시고, 저희가 나서서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옆에 리우(Lieu) 변호사님은 우리 얘기 알아듣고 있는 건가요?" 나는 옆에 앉아서 계속 우리의 얘기를 듣고 있는 베트남 여자 변호사가 한국어를 알아듣는 건지 백 변호사에게 물었다.
"네 조금 알아들을 수 있어요." 백 변호사가 대답하며 리우(Lieu) 변호사를 쳐다봤다.
"한국어는 조금 알아듣고, 영어로 얘기할 수 있습니다." 리우(Lieu) 변호사가 영어로 대답하며 웃는다. 이 변호사는 검은색 정장 바지와 재킷을 입고 있었는데, 베트남 여자 중에서는 키가 큰 편이라고 생각했다. 165cm 이상 되어 보였다.
"그런데 저 못 알아보세요?" 리우(Lieu) 변호사가 묻는다.
"예? 저랑 만났던 적이 있나요?"
"제가 너무 못생겨서 기억이 안 나시나 봐요? 저는 법인장님을 7년 전에 만났었는데." 리우(Lieu) 변호사가 웃으면서 그리고 서운하다는 듯 나에게 말을 건넸다.
"아! 알아요. 저희 동네에 사셨잖아요?" 이제야 예전에 만났던 리우(Lieu) 변호사가 생각났다. 나와 동갑의 한 동네에 살던 베트남 여자 변호사다.
"처음 베트남 오셔서 거래처랑 소송업무 할 때, 제가 대표님 회사 담당이었잖아요. 그때 저는 다른 로펌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이 사건 받고 나서 법인장님 이름을 보고선 너무 신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나서서 잘 해결해 드릴게요. 제가 법인장님 명예는 꼭 지켜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고마워요."
리우(Lieu) 변호사는 7년 전 사건이 해결된 그 이후에도 우리 회사의 직원들과 연락을 하며 법률적인 도움을 간간이 주고 있었고, 덕분에 내가 베트남에서 어떤 활동을 하며 지냈는지 듣고 있었다고 했다. 나는 그녀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것이 좋은 징조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을 했다.
광야 법무법인의 변호사와 첫 미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늦은 저녁 카니발의 뒷자리에 앉아 설교 동영상을 보고 있는데, 백 변호사에게 문자가 왔다.
[피곤하시더라도 식사 꼭 챙겨서 하시고, 가벼운 산책이 도움이 되실 수도 있습니다. 내일 연락드리겠습니다.]
나는 이를 하늘이 내게 보내는 문자로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