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움은 그 시작을 기억하게 한다.'
그래서 요즘 내 베트남 생활의 시작을 생각한다. 벌써 7년이 되었다.
"3년 정도 생각하면 될 거야. 그 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할 테니까 잘 생각해 보라고, 좋은 기회가 될 거야. 다녀오면 분명 더 좋은 포지션으로 근무할 수 있을 거네" 이렇게 한 임원의 권유를 듣고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 3년은 지났고, 이제 그 윗분은 회사에 없다. 그리고 난 3년 만에 아니, 적어도 6년 만에 돌아갔어야 했다.
그렇게 지금은 퇴사하고 없는 한 임원과의 면담을 마친 지 2주 만에 베트남 호치민(Ho Chi Minh)에 도착하게 되었다. 출장으로 먼저 베트남 법인을 체크해 보고 오라는 말에 처음으로 2주간의 베트남 방문을 하게 된 것이다. 내가 근무해야 하는 회사는 호치민의 떤선녓(Tan Son Nhat) 공항에서 2시간을 더 들어가는 동나이(Dong Nai)성의 한 공업단지에 위치해 있다. 1월인데도 30도를 넘는 습하고 뜨거운 날씨에 힘들었지만, 멀미 나는 어지러운 도로를 지나는 것보단 견딜만했다. 처음 베트남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나는 도로의 오토바이들을 사진 찍으며 앞쪽 범퍼의 칠이 살짝 벗겨져있는 은색의 이노바(INNOVA) 차량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2시간이 걸려 공장에 처음 도착한 뒤 베트남 직원들과 인사를 나눴다. 유창하지 않은 나의 영어 실력으로 더듬더듬 인사를 한 다음,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직원과 만났다. 키가 작고 까무잡잡한 얼굴을 한 푸른색의 공장 작업복을 입은 남자 직원이었다. 이름이 끄엉(Cuong)이라고 했다. 강하다는 뜻이라고 설명도 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한국식 한자로 말하면 '강(强)'이라는 글자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과거에 한국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고, 그때 한국어를 배운 덕분에 통역 겸 생산팀 중간 관리자로 근무를 하고 있었다. 공장 건물을 함께 돌면서 자세히 보니 끄엉(Cuong)은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사무동 건물 옆에 있는 작은 쉼터에서 잠시 앉아 얘기 좀 하자고 했다. 그렇게 끄엉(Cuong)의 한국 생활에 대해 얘기하다가 난 끄엉(Cuong)이라는 이 직원을 한국에서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지? 끄엉(Cuong)! 우리 한국에서 만난 적 있는 거지?" 난 반가운 마음에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네. 맞습니다. 그때 IFC에서 만났었어요." 끄엉(Cuong)이 하얀 윗니가 다 드러나게 웃으며 맞다고 확인해 주었다.
나는 한국에서 대학교 다니던 시절부터 취직하고 3년 정도가 되던 때까지 한 봉사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다. "IFC(International Friendship Center), 국제 친교 센터"라고 부르던 곳이다. 거기에서 약 5년 정도 봉사를 하면서 나는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온 근로자들과 함께 여행도 다니고, 한국어 공부, 미용 봉사를 시켜주는 일을 돕곤 했었다. 그 단체에서 지금 내 앞에 있는 끄엉(Cuong)이라는 친구를 만났었다. 끄엉(Cuong)은 한국의 한 비닐 제조 업체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대답을 늦게 한다는 이유로 한국 사장님한테 몽둥이로 맞아 다리가 부러진 적이 있었다. 불법체류를 이유로 그 당시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 그는 이렇게 다리를 전다. 또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한국 남자가 소리를 지르면 본인도 모르게 몸을 움츠린다.
그 당시, 나는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의 한국 본사에 막 취직해서 다니기 시작했었다. 신입사원이었는데 끄엉(Cuong)의 다른 베트남 친구들 3명이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던 나에게 전화를 했다. 내 하얀색 싸이언 핸드폰이 벨을 울리고, 난 사무실 밖으로 나가 7층 흡연실 난간에서 그들과 통화를 했다. 우리 회사 1층에 왔다고 만나자고 하는 것이었다.
"왜? 왜 갑자기 여기까지 찾아왔어?" 회사 접견실로 그 3명의 베트남 남자를 불러들여 얘기를 했다. 환절기였던 것 같다. 강렬한 붉은색의 바람막이를 입고 있던 한 명의 베트남 친구가 기억에 남는다.
"Lim, 아니 형님! 이거 심각한 일이야. 도와줘, 도와줘야 돼. 그 나쁜 놈 진짜 죽여야 돼." 그중 한국어를 잘하는 친구가 나한테 말을 했다. 어떤 친구는 손바닥으로 빡빡 밀어버린 자기의 머리를 치며 알 수 없는 베트남 말을 하기도 했다. 회의실 밖을 지나는 다른 선배 직원이 회의실 안쪽을 흘깃 쳐다본다.
"왜? 무슨 일이야? 여기 와서 나한테 얘기하면 내가 도와줄 수 없을 것 같은데. 이번주 모임에서 다시 얘기해 줘." 신입사원인 나는 근무시간 중에 이렇게 나와있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되고 눈치가 보였다.
"아니, 진짜. 이거 사장, 이 놈 죽여야 돼. 어떡해. 어떻게 신고해? 어디에 신고해? 내 친구 힘들다. 아프고 돈도 못 받는다." 그러면서 갑자기 담배를 꺼낸다.
밖에서 선배 사원이 계속 회의실을 쳐다본다. 당황한 나는 그들에게 이번주 모임에서 얘기하자며, 회사 밖으로 그들을 내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봉사단체의 모임에 나오지 않았고, 끄엉(Cuong)은 다리를 절게 되었다.
'십오 년은 된 것 같은데, 이렇게 베트남에서 다시 만나다니? 그리고 비록 서로 다른 나라이기는 하지만, 수년간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니? 이건 분명히 내가 여기 베트남에서 근무하게 될 운명이다. 그래, 어떤 사인 같은 것이다.'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난 아직도 그 IFC라는 단체에 매월 후원금을 보내고 있다.
2주간의 출장을 마치고 한국에 복귀했다. 15년간 한국 본사에서 근무하던 나는 베트남 법인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매출이 없고, 적자를 벗어나기 힘든 상황이다. 내 친한 직장 동료들은 절대 베트남에 가면 안 된다고 조언을 해주었다. 직원들의 무덤이라고 소문난 곳이라고 했다. "거기 알잖아? 해외 법인 살린다고 일 잘하는 직원들 보냈다가 그만두게 하는 곳이야." 나도 알고 있다. 보통 2년 이내에 퇴사를 하거나, 퇴사를 당하는 곳이었다.
끄엉(Cuong)을 만난 것을 생각했다. 그리고 하늘에 물었다. '이거 나한테 보내는 신호 맞는 거죠?' 물론 이 신호만으로 베트남에 들어온 것은 아니다. 나도 여러 계산을 했고, 가능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린 후에 들어오게 되었다. 하지만, 그 모든 계산의 변수 옆에 이 사건은 긍정의 작은 상수로 붙어있었다.
그리고 나는, 7년째 여기 베트남에서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