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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안 Aug 16. 2019

그의 바다에 담긴 것

<이타미 준의 바다>


“사람의 생명, 강인한 기원을 투영하지 않는 한 사람들에게 진정한 감동을 주는 건축물은 태어날 수 없다. 사람의 온기, 생명을 작품 밑바탕에 두는 일. 그 지역의 전통과 문맥, 에센스를 어떻게 감지하고 앞으로 만들어질 건축물에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땅의 지형과 ‘바람의 노래’가 들려주는 언어를 듣는 일이다.”_(돌과 바람의 시 中)


제주도의 나무숲이 보인다. 나무숲 틈 속에서 흙색 옷을 입은 어린아이가 뛰어온다. 비가 온 다음인지 비를 머금은 풀을 밟는 아이의 발소리가 바스락 소리를 내며 초록 경관에 생명력을 더한다. 아이는 어디로 가는지 카메라가 뒤따라 걸어간다. 제주도의 바다가 나타나고 아이가 모래사장에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아이가 돌 위에 우두커니 서서 바다를 바라본다. 이 아이가 바라보는 저 바다인지 이제부터 알려주겠다며 영화의 제목이 올라온다. 이타미 준이라는 사람의 바다, 그의 바다에서는 어떤 바람이 불어오고 어떤 돌과 부딪히고, 어떤 소리를 만들지 찬찬히 따라가 보자.




20평 남짓 되는 작은 공간에 작은 정원과 작은 서재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마당의 풀들이 어지러이 널려있는 낮고 소박하게 조용히 앉아있는 이 집이 그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집이다. 그의 이 소박한 집은 건축 거장의 집이라 말하기에는 어색할 정도로 단조롭고, 소박해 보인다. 하지만 이타미 준의 둘째 딸은 저녁 늦은 시간에 일어나 창밖을 보면 항상 아버지의 서재에 빛이 새어 나왔다고 말한다. 그는 이곳에서 언제나 자신의 창작을 멈추지 않았고, 한국에 대한 애정을 이어 나아갔던 것이다.



자연

수.풍.석 박물관

제주도를 이루는 세 가지 소재가 있다면 그것은 물과 바람 그리고 돌일 것이다. 이타미 준은 제주도에 세울 미술관에 이 세 가지 소재를 활용하여 제주도에 어울리는 건물을 짓기 시작한다.


제주도_수 미술관


바람을 어떻게 건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타미 준은 그것을 듬성듬성 내리그어진 벽면으로 다가간다. 본디 평범한 건축은 바람을 차단하기 위한 방법으로 보다 튼튼하게, 매끈하게 지으려 하지만 이타미 준은 이를 반대로 뒤집어 부드럽고, 사이가 벌어진 벽 틈 사이로 바람을 표현한다. 사실 “바람을 표현한다.”기 보단 그 자체로 바람이라는 감각이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그의 풍 박물관은 바람이 벽 사이를 새어 들어오는 소리가 아름답게 공간을 채운다.


수 박물관과 석 박물관 역시 보고 있으면 이것이 왜 수 박물관이며 이것이 왜 석 박물관인지 저절로 끄덕이게 만든다. 비가 오는 것을 그대로 담아 건물 한가운데에 떨어지게 만들어 빗소리로 물을 느끼게 만드는 수 박물관. 단단한 철제 벽 안에 가득한 어둠이 만드는 돌의 단단함과 지붕으로 들어오는 빛으로 발견되는 돌 특유의 결을 발견하는 석 박물관. 이 세 가지 박물관 모두 자연적 소재를 건축물로써 담아내고 자연과 건축 사이에서 조화로움을 잃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 수풍석 박물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물과 바람과 돌로 지은 시”



사람

이타미 준의 본명은 유동룡(伊丹潤)이다. 제일교포인 그는 일본에서 자신의 한국 이름으로 당당히 학교를 다녔지만 일본에서 사무소를 내고 건축일을 하기 위해서 자신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이 필요했었다. 그래서 자신과 친하던 작곡가 길옥윤씨와 자신이 한국으로 갈 때 이용한 공항의 이름을 따서 지금의 예명, 이타미 준을 만들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이방인이라 말하며 자신의 정체성과 한국과 일본 모두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의 상황에 대한 서러움을 토로하던 사람이었다. 경계에 놓여 고독하며 불안하게 떠있는 존재. 그의 작품들 중에서 ‘먹의 집’, ‘먹의 공간’은 그의 불안하고 고독한 내면을 잘 나타내 준다. 검은색의 방 안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마르고 작은 나무 한 그루, 그리고 그 나무가 틈 사이로 뿌리내린 돌. 마치 자신의 심정과 처지를 상징하는 것만 같은 이 공간을 보고 있으면 지독한 고독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작은 창으로 새어들어온 한 가닥의 빛이 나무 옆을 서성거린다. 이타미 준에게 이 빛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이 경계선에서, 불확실한 세상에서 희망으로 생각한 것은 아마 그의 건축이 추구한 방향성에 있을 것이다. 글의 시작에서 적은 글을 다시 가져와야겠다.


<이타미 준의 건축 연대표>
“사람의 생명, 강인한 기원을 투영하지 않는 한 사람들에게 진정한 감동을 주는 건축물은 태어날 수 없다”


그에게 한 줄기의 빛이 되어주었던 것은 사람, 사람을 향한 마음이었던 것이다.



바다

<이타미 준의 바다>는 바다로 시작하여 바다로 끝을 맺는다. 예술가의 마을이라 불리는 시미즈의 바다를 보며 자란 탓일까. 그 역시 예술에 대한 조애가 깊었으며, 원래 건축이 아닌 화가가 하고 싶었다고 한다. 자신을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배라고 말하기도 한 그는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 위에서 자신의 삶을 개척해간다. 그리고 그가 개척한 그의 바다에는 바람과 돌, 물과 흙이 있었고 시간이 곁에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가 정작 바란 것은 사람이었다. 그의 바다는 언제나 사람을 향해 있으며 사람을 위한 공간이다.



바다로 시작되어 바다로 끝나는 이 영화 속에 자리 잡은 수많은 사람들이 이타미 준에 대해 추억한다. 자신의 동료들,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 그의 건축물들, 클라이언트들과 친구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까지 그의 바다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 이타미 준의 바다를 가득 채운다.



<이타미 준의 바다>에서 이타미 준은 배우의 힘을 빌려 자신의 여정을 여행한다. 영화는 어린 시절 바다를 보던 어린아이부터, 불안했던 청년시절 그리고 꿈을 펼쳐 나아간 시절까지 이타미 준의 삶을 이타미 준에게 선물한다. 제주도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던 이타미 준에게 영화의 결말은 그 소망을 위해 자리를 마련한다. 제주도의 바다를 바라보는 이타미 준으로 영화는 끝이난다. 하지만 감독은 <이타미 준의 바다>에 나오는 아이와 청년 그리고 노인을 단순히 재현 배우라 칭하는 것을 철저하게 부정한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정다운 감독은 영화에 나오는 이들이 이타미 준의 건축 세계에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하는 ‘시간’에 대한 상징이며 그들은 이타미 준이 될 수도, 우리가 될 수도 있는 입체적인 상징물이라 설명한다. 바다에서 시작되고 바다로 끝나는 이 여행길은 우리에게 과연 자신의 바다에 무엇을 담을지 질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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