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봄날의 떡집

8. 악몽

by 신성화

그 꿈이었다. 몇 달 동안 꾸지 않던 꿈. 동백나무가 보였고, 동박새가 보였다. 하지만 앞선 두 번의 꿈과는 무언가 달랐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동박새의 울음소리도, 어린 아이의 반가운 목소리도 없었다. 다리를 움직여 걸어보려 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팔이라도 뻗어 이 악몽 같은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사지가 뻣뻣하게 굳어버린 것만 같았다.


으슬으슬 떨리는 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희미한 빛이 보임에도 어둠의 중압감이 몸을 찍어 누르며 점점 숨통을 조여 왔다. 무언가 잘못 되었다고 느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안 돼! 제발!"


소리를 내지르며 잠에서 깬 봄나래는 아직 눈을 감고 있었다. 뜨끈한 눈물이 쉴 새 없이 귓가에 흘렀다. 봄나래는 손에 느껴지는 부드럽고도 단단한 생기가 국화라는 걸 알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방안에 그윽하게 퍼지는 국화향이 봄나래에게도 닿았다.


여전히 흐느끼고 있는 봄나래의 손이 스르르 풀리자 한 다발의 국화가 이불위에 쏟아지듯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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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배송 업무가 끝나고, 사진관 사장님도 다녀간 후 떡집에는 여유가 찾아왔다. 봄나래는 까칠한 얼굴을 쓰다듬으며 서랍에 넣어두었던 종이를 꺼냈다.

[장소는 마당. 동백나무 앞. 말하는 동박새. 정체모를 어린 아이 목소리. 4월 10일 첫 번째 꿈에서 받은 건 복숭아와 사과. 4월 17일 두 번째 꿈에서 받은 건 쑥.]

지난 꿈으로부터 벌써 6개월이나 흘러 있었다. 봄나래는 펜을 들어 오늘 꾼 새로운 꿈의 내용을 천천히 써 내렸다. 손이 떨려서 글씨에 닿는 힘이 적었다.

[10월 15일 세 번째 꿈에서 받은 건 국화. 그러나 전과 달리 악몽.]

앞선 두 번의 꿈을 꾸었을 때는 얻은 재료들로 바로 떡을 만들었었다. 하지만 오늘 받은 국화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냥 화병에 꽂아둔 채였다. 봄나래가 진열장 위에 올려둔 국화꽃을 바라보고 있는데 종소리가 떡집 안에 울려 퍼졌다.

"봄나래. 나 왔어. 잘 지냈니?"


함박웃음을 지으며 가게로 들어온 사람은 지애였다. 옆에는 재연도 함께였다.


"언니. 여행은 즐거우셨어요? 그리고 축하해요."


말하지 않아도 여실히 임신 태가 나는 지애를 보며, 봄나래는 오늘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여행은 한 달했나. 임신 확인하고 바로 접었지. 여태껏 친정에 있다가 오는 길인데 봄나래네 떡이 그렇게 먹고 싶더라고."


"어떤 걸로 드릴까요? 아가는 뭘 먹고 싶니?"


봄나래가 지애를 향해 한 번, 지애의 배를 향해 한 번 물었다.


"떡케이크 종류별로 네 개만 담아줘. 아가들이 봄나래가 골라주는 걸로 먹겠대."


"아가들이요?"


"여기 쌍둥이 들었어."


지애가 유쾌하게 배를 가리키며 환하게 웃었다. 봄나래의 놀란 표정과 지연과 재연의 웃음이 떡집 안에서 반짝반짝 빛났다.


잠시후 재연이 포장된 떡케이크를 받아들자, 지애가 봄나래에게 자그마한 상자를 내밀었다.


"선물이야. 우리 둘이 이야기 해봤는데, 아무래도 전에 선물로 받은 복숭아 단자랑 사과 단자 먹고 임신한 것 같거든. 고마워, 봄나래."


"고마워요, 봄나래씨."


봄나래는 두 사람의 인사에 어색하게 상자를 받아들었다.


"받아도 될지... 감사해요."


그때 종소리가 딸랑 울리며 강은이 해나와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는 드나들기가 편해서 좋아."


강은이 휠체어를 타고 들어오자 떡집 안은 활기로 가득했다. 그곳이 어디든 강은에게는 분위기를 휘어잡는 힘이 있었고,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말솜씨가 있었다.


강은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지애네 부부가 가게를 떠나고, 강은은 옆에서 보채는 해나를 달랬다.


"떡볶이. 빨리."


어른들의 대화가 지루했던 해나는 거의 울상이었다.


"알았어, 알았어. 봄나래야, 떡볶이떡 하나만."


"네. 잠시만요."


강은이 떡을 넘겨받는데 해나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봄나래 이모, 이 카메라는 뭐에요?"


"카메라?"


해나가 가리킨 곳에는 봄나래가 가게에 둔 적 없는 카메라가 있었다.


"그거 사진관 사장님 카메라 아니야? 들고 다니시는 거 여러 번 봤는데."


강은이 눈에 익은 카메라를 보며 말했다.


"아까 오셨었는데 두고 가셨나 봐요. 이따가 진서씨 오면 전해줘야겠네요."


봄나래는 카메라를 챙기며 강은과 해나를 배웅했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사라진 떡집 안은 적막이 흘렀다. 봄나래가 카메라를 진열장 위 국화 옆에 올려두는데 또 다시 딸랑이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세요."


인사를 건넨 봄나래는 가게 안에 들어온 손님을 보고 놀랐지만 티내지 않으려 조심했다. 언젠가 이담이 잘생긴 사람을 봤다며 방방 뛴 일이 기억났다. 그때 그 사람도 이렇게 잘 생겼을까. 그랬다면 그날 보인 이담의 반응도 이해가 됐다.


잘생긴 얼굴만큼 눈길이 가는 건 여름도 다 지난 지금 들고 다니는 접선이었다. 접선에 달린 장식품이 특이했다. 느긋한 동작을 따라 천천히 흔들리는 장식품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생긴 건 꼭 나침반 같았다.


"악몽은 언제나 괴로운 일 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장식품을 유심히 바라보던 봄나래는 뜬금없는 질문에 멈칫했다.


"꿈속의 악몽도, 현실의 악몽도 끔찍할 테니까요."


"누구시죠?"


봄나래의 물음에 가볍게 웃어 보인 남자가 진열장 위의 국화를 접선으로 가리켰다.


"꿈속에서 받은 이 꽃.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그걸 어떻게. 당신, 뭐에요."


"전처럼 하세요. 필요한 사람에게 닿을 겁니다."


"누가 장난을 치는 거죠? 당신이에요?"


"장난? 재밌네요. 당신이 만든 떡을 먹은 사람을 만났잖아요."


"그건...... 그럴 수는 없어요. 지애 언니의 말이 사실인가요?"


봄나래가 답을 구하는 간절한 눈빛으로 물었다. 정체모를 이 남자가 꿈에 대해 많은 사실을 아는 것 같았기에.


"믿기 어려운 일이기는 하죠.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은 아니니."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데요? 이 특별한 일이라는 거!"


봄나래의 목소리가 점점 떨리며 격앙되었다.


"누구든지 악몽에서 깨야죠. 어느 곳에 있더라도."


"그게 무슨 말인데요?"


봄나래의 붉어진 눈에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이미 답을 알고 있군요."


남자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혹시, 정말 혹시......"


"기다려줘요. 스스로 밝힐 때까지."


남자가 접선을 펼치더니 봄나래 쪽으로 바람을 일으켰다.
봄나래는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핸드폰 알람이 '웹진 인터뷰'라는 내용을 알리며 진동을 울리고 있었다. 봄나래가 계산대에 엎드리고 있던 상체를 일으키며 알람을 껐다.


"언제 잠든 거지. 그 남자도...... 꿈이었나?"


손가락으로 이마를 꾹꾹 누르는 봄나래의 눈가에 촉촉한 물기가 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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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봄날의 떡집' 1화 보기

이 봄날의 떡집 - 새벽이슬 내릴 무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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