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관 입구에서 심호흡을 한 이담이 평소보다 활짝 웃으며 문을 열었다.
"삼촌. 안녕하세요. 저 왔어요."
"이담이 왔냐? 내가 알지. 소 가네 고명딸."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근희가 안경을 코에 걸친 채 이담을 반겼다. 이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혹시 잘못 말한 건 아닌지 살피는 티가 역력했다. 조명을 만지고 있던 진서는 이담을 반긴 뒤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진서의 시선이 이따금씩 근희에게 슬쩍슬쩍 닿았다.
"부모님 결혼사진을 내가 찍어줬었지. 한 번 볼 테냐?"
근희가 옛 추억을 떠올리며 이담에게 권했다.
"예. 보여 주세요. 저도 궁금하네요."
이담은 처음 듣는 제안인 듯 반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이담이 왔었다는 사실도, 오늘처럼 사진을 보여줬다는 사실도, 근희는 기억하지 못했다.
"가만 있어보자. 여기 있을 텐데."
사진을 찾으러 가는 근희의 모습을 곁눈질하며 진서가 오래된 카메라를 쓰다듬었다. 이담은 사진관 벽에 붙은 다른 사진들을 둘러보며 시선을 돌리다가 울리는 핸드폰을 받았다.
"네. 최 과장님. 어쩐 일이세요? 그래요? 잠깐은 괜찮아요. 거기 계시는거면 떡집 앞에서 뵐까요? 15분 정도 뒤에 도착해요. 네."
이담이 전화를 끊자 근희가 사진을 내밀었다.
"여기 있다. 자, 봐라. 너는 엄마를 아주 똑같이 닮았어. 선주가 덕기 그놈이랑 결혼할 줄 아무도 몰랐지."
근희가 허허 웃으며 보여주는 부모님의 결혼사진을 보며 이담도 그저 따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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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재가 최 과장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안 건 불과 15분 전이었다. 당연히 부동산으로 향할 줄 알았던 차가 한 통의 전화와 함께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이장님 접니다. 은하수리에 빈집 좀 알아보려고요. 시간 괜찮으십니까? 지금 회사 앞인데 계신 곳으로 가겠습니다. 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예."
최 과장의 통화가 끝나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승재가 말문을 열었다.
"부동산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승재가 다소 난감한 표정이었다.
"그런 일은 이장님한테 물어봐야 한다니까 그러네. 자. 가보자고."
승재가 반쯤 체념한 채 창밖을 내다봤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의 색과 완전히 다른 색이 곳곳을 뒤덮고 있었다.
'느긋하게 경치도 보면서 다녀요. 누가 안 쫓아오거든요.'
슈퍼에 들렀다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 우연히 마주친 이담의 말이었다. 그 이후로 도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계절의 흐름을 처음으로 온전히 느껴보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 때문일 거다. 더 깊어질 가을과 눈 내릴 겨울과 다시 새싹이 돋을 풍경이 궁금한 거다. 좀 더 머물고 싶은 거다. 이름처럼 별도 많이 보이는 이곳 은하수리에서.
"저기 트럭 온다. 내리자."
떡집 맞은편에 차를 세운 채 이담을 기다리던 최 과장이 말했다.
떡집 앞에 트럭을 주차하고 내린 이담은 설마 하는 얼굴로 길 건너편에 서있는 최 과장과 승재를 번갈아 보았다.
"진서야, 장비 먼저 안에 들여놓고 있어줘."
진서가 고개를 끄덕이고 장비를 챙기다가 멈춰서 세 사람의 모습을 지켜봤다. 승재의 눈이 반짝 빛나던 순간 진서의 손에 들린 카메라의 셔터가 눌렸다. 진서가 카메라 LCD창에 기록된 몇 장의 사진을 만족스럽게 바라보고 떡집으로 장비를 옮기기 시작했다.
노란 통학 버스가 지나간 뒤, 최 과장과 승재가 길을 건너왔다.
"아니죠?"
최 과장에게 묻는 말인지, 승재에게 묻는 말인지 아리송한 질문이었지만 대답은 승재의 입에서 들려왔다.
"맞습니다. 빈집 구하는 거."
"일 년만 있다가 간다면서요. 벌써 10월인데 왜 굳이 지금 빈집을 구하고, 거길 꾸미는데 돈을 쓰고, 신경을 쓰고, 머리 아픈 일을 벌이려고 해요?"
"살아보고 싶어서요. 이곳에서."
승재의 대답에 이담의 말이 없어지자 최 과장이 나섰다.
"두 분이 말씀 나누시고.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최 과장이 너털 웃음을 짓고는 다시 길을 건너 차에 올랐다. 차가 출발하고 잠시후 전화가 오자 최 과장이 밝은 표정으로 핸들에 있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예. 덕기 형님. 지금 가는 중입니다. 일단 계기는 마련했으니 두 사람에게 맡겨놔 보시죠. 예예. 막걸리 좋습니다. 차 대놓고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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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기와 최 과장의 모의를 알 리 없는 이담과 승재는 아직 침묵 속이었다. 고민하던 이담이 말문을 열었다.
"지금은 회사 부지 내 사택에 살아서 모르겠지만 마을에서 살려면 사람들이랑 어울려야 할 거에요. 그거 할 수 있겠어요?"
이담은 승재가 마을을 돌아다니며 만나는 사람들과 인사 정도는 나눠도 다른 교류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제부터 해봅시다. 날 도와주면 되잖아요. 나도 노력할 거고."
"제법 뻔뻔한 면이 있네요. 그래요. 얼굴에 철판 깔고 들이대는 자세 좋아요. 그게 필요하거든요."
이담의 농담 섞인 진심에 승재가 웃었다.
"근데 아까 지나간 노란 버스는 뭡니까? 통학버스 같은데."
"초등학교가 하나 있어요. 이 주변 아이들이 다니는. 부럽네요. 노란 버스. 나 다닐 때만 해도 소달구지 타고 다녔는데."
"소달구지요?"
승재가 예상치 못한 단어에 당황하며 되물었다.
"안 타봤죠? 재밌는데."
"저랑 동갑이라던데 최 과장님이 잘못 알고 계신 겁니까?"
"아니요. 동갑 맞아요. 그때는 워낭 소리 들으면서 흙길을 달리는 맛이 있었죠."
"아...그랬군요. 그때 이곳은 교통 사정이 열악했나 봅니다."
승재가 어설프게 이유를 만들어 내자 이담이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웃었다.
"이걸 믿네요. 소달구지 타본 적 없어요, 나도. 차 타고 다녔어요. 이것저것 배우려면 갈 길이 멀겠네."
이담이 겨우 웃음을 진정시킬 무렵, 떡집 사진을 찍는 척하던 진서가 다가왔다. 두 사람의 모습을 사진에 담다가 새겨진 희미한 미소는 열심히 감춘 뒤였다.
"빈집 몇 개 같이 둘러보러 가죠. 연락할게요."
이담의 말에 승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담이 떡집으로 들어간 후, 승재가 진서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길을 건너려는 승재의 발길을 진서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누나한테 관심있어요?"
담백하게 날아온 놀랍도록 악의 없고 당황스럽게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아닙니다."
승재는 처음 만난 사이에 첫 대화로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정중하게 답했다.
"카메라는 거짓말 안 해요."
진서가 떡집 안으로 들어가다 입구에 멈춰섰다.
"전 예진서입니다. 다음에 또 봐요, 형님."
진서의 뒷모습을 따르던 승재의 시선이 유리창 안 이담에게 닿았다.
"카메라는 거짓말을 안 한다."
승재가 진서의 말을 되새기며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좁은 길에서 이담을 마주친 첫 만남, 최 과장님이며 다른 회사 사람들과도 자연스레 어울리던 모습, 이장이라며 바쁘게 동네를 휘젓는 움직임. 이담과 만났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운동 겸 자전거를 타고 은하수리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이담의 트럭과 만나기를 바랐던 순간까지.
"맞는 말이네."
은하수리에서 겪는 낯설고 이상한 일들 중 오늘만큼 황당하게 마음에 드는 일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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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봄날의 떡집' 1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