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녀왔습니다.”
집안에 퍼진 소고기뭇국의 냄새에 허기가 졌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니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손 씻고 와서 밥 먹어. 5시 버스라고 했지?”
입고 있던 검정색 롱패딩을 소파 위에 벗어두며 “응. 짐 먼저 챙기고 먹을게요.”라고 대답했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맞은편에 위치한 내 방으로 들어갔다. 방을 이루고 있는 색은 흰색과 연한 갈색 두 가지 뿐이었다. 방에 놓인 가구는 모두 한 곳에서 구매했기 때문에 나무 재질의 침대며, 옷장, 책꽂이, 책상, 의자는 모두 색이 같았다. 벽지와 침대 위에 잘 정리된 이불은 흰색이었다. 필요한 것만 놔둔 정적인 방이었다.
방은 아침에 나가면서 정리해 둔 그대로였다. 침대 위도, 책상과 책꽂이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연필꽂이에서 펜을 들고,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메모지를 꺼냈다. 옷장을 열어 뒤로 맬 수 있는 검은 가방을 찾아 침대 위에 올려두었다.
메모지에 적힌 내용에 따라 옷을 챙기면서 하나씩 목록을 지워갔다. 종류별로 정리되어 있는 옷들 사이에서 챙겨야 할 옷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잘 접힌 옷가지를 들어 가방에 넣을 때마다 섬유유연제의 향이 풍겨왔다.
짐이 얼마 없다고 생각했는데 가방이 거의 꽉 찼다. 겨울옷이라 부피가 큰 탓이었다. 세면도구를 넣고 나면 자리가 없겠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옷장을 닫기 전 접어서 보관이 가능한 남색 가방을 꺼냈다. 에펠탑이 그려진 가방이었는데 간식거리를 담을 용도로 쓰기에 좋을 크기였다. 검은 가방의 옆 주머니를 열어 여분의 가방을 담았다.
마지막으로 챙길 것은 책이었다. 책장의 책을 살펴봤다. 한 눈에 들어오는 책꽂이였지만 서점에 진열해 놓은 책들처럼 십진분류법에 따라 꽂아 두고 있었다.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부터 생긴 습관이었다. 책장은 왼쪽 다섯 칸, 오른쪽 다섯 칸으로 총 10칸이었고, 그 안에 놓인 책은 총 150권이었다. 왼쪽 다섯 칸과 오른쪽 밑에 세 칸은 소장용 책 130권이 꽂혀 있었고, 오른쪽 두 칸에는 아직 읽지 않은 20권의 책들이 있었다.
원래는 책이 더 많았지만 책꽂이에 여유롭게 넣을 수 있는 정도만 빼고 정리한 것이었다. 점점 늘어나는 책들로 내가 책을 보관해 놓은 것인지, 책 보관소에 내가 들어와서 사는 것인지 헷갈렸기 때문이었다. 150권을 제외하고 모든 책들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거나 기부했었다. 지금도 새로운 책이 한 권 들어오면 기존의 책을 한 권 빼는 식으로 책의 총량을 유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빨리 와서 밥 먹어!”
“가요!”
엄마의 재촉에 답하며 책꽂이 왼쪽 두 번째 칸에서 책을 꺼냈다. 한 권의 틈이 난 부분에 책꽂이의 색이 경계 지어져 있었다. 경계선 안쪽 깊숙한 곳의 옅은 부분과 바깥쪽의 짙은 부분만큼의 시간이 묻어 있었다. 빈 칸의 오른쪽에 놓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2권을 꺼냈다. 경계선이 두 배로 늘어났다.
책을 꺼내는데 편지지 묶음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한 장씩 떼어 쓸 수 있게 된 편지지는 기억 속에서 잊힌 지 오래였다. 언젠가 필요해서 사두고서 몇 장 쓰다가 잃어버렸는데, 라고 생각하며 편지지를 주워들었다. 여기서 발견하게 될 줄이야.
편지지 묶음을 몇 장 넘겨봤다. 종이 색이 바래서 편지지로 쓰기는 어려웠지만 버리기는 아까웠다. 책상 서랍에 넣어두려다 영릉에 갈 때 챙겨가기로 했다. 낙서를 하거나 무언가를 끼적일 때 쓰기 위해.
가끔은 그런 사람이 한 명 있었으면 했다. 평생 얼굴은 모르고 살면서 편지만 주고받을 사람. 메신저나 이메일 말고 손으로 적어 내려간 편지여야 한다. 담백한 편지지에 정갈하게 적힌 글씨. 내용이 짧던 길던 진심으로 써내려간 마음. 그거면 될 것 같은. 그런 편지를 주고받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하며 샀던 편지지였다.
뜯겨져 나간 편지지 묶음의 빈틈만큼 전했던 나의 편지. 그 편지들은 대부분 얼굴을 아는 지인들에게 감사인사용으로 보내졌었다. 물론 감사는 진심이었다. 그럼에도 내 깊숙한 곳에서부터 원하는 편지는 아니었던 셈이다.
잊혔던 편지지를 찾아내자 얼굴도 모르고, 심지어 형태도 분명하지 않은 ‘어떤 사람’이라는 존재가 몹시 그리워졌다. 보고 싶다는 말이 아니라 그립다는 말이 어울렸다. 바래진 종이의 시간만큼, 책꽂이의 경계선만큼, 잊고 있었던 그 누군가가.
두 권의 책과 펜, 편지지까지 넣고 가방을 잠갔다. 제법 무게가 나갔다. 가방을 들어 소파 위에 벗어둔 패딩 옆에 나란히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