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얼굴에 핀 꽃

1.

by 신성화

깨끗하게 비워진 접시들을 치웠다. 설거지는 내 몫이었다. 고무장갑을 끼고 수세미에 세제를 짜서 거품을 냈다. 거품과 함께 레몬향이 피어올랐다. 빈 접시들이 나의 손길을 따라 거품을 잔뜩 뒤집어썼다. 몽글몽글한 옷을 입고 쌓인 그릇들을 하나씩 물로 씻어갔다. 뽀득뽀득 씻겨가는 접시들이 원래의 색을 찾아갔다. 파란 접시 위에서 쓸려가는 세제 거품이 바다 위를 훑는 파도 같았다. 바다. 나는 겨울바다로 갈 것이다.


“이런.”


탄식과 함께 혼잣말을 내뱉었다. 가위에 묻은 거품을 닦아내다 고무장갑의 일부를 잘라내고 말았다. 다행히 피부는 다치지 않았지만 작게 벌어진 틈 사이로 물이 새어 들어왔다. 팽팽하게 손을 보호하던 분홍색 고무장갑은 제 능력을 잃었다. 손이 한껏 축축해지고 있었다. 들고 있던 가위를 빠르게 씻어내고 남은 수저도 씻어냈다. 행주를 빨아 식탁과 싱크대를 닦아내고 박박 빨아서 수도꼭지 위에 널어두었다.


고무장갑을 벗었다. 물이 찬 오른손 장갑을 먼저 벗겼어도 될 텐데 몸에 베인 습관대로 왼쪽 손을 먼저 빼냈다. 오른쪽 고무장갑을 벗어 손목부분을 싱크대에 쏟아내니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양쪽 고무장갑을 쥐고 물기를 털어낸 다음 한쪽에 잘 널어두고 주방용품을 보관해 둔 서랍장을 열었다. 여분의 고무장갑이 있었다. 물건을 두 세 개씩 미리 사두는 버릇이 이런 때는 다행이다 싶었다.


새 고무장갑을 꺼내두고 지난 고무장갑을 휴지통에 버렸다. 하얀 휴지통에 담긴 분홍 고무장갑의 모양이 괴기스러웠다. 그곳에 있지 말아야 할 것이 그 곳에 있는 것 같았다.


“다했으면 와서 과일 먹어.”


“응.”


엄마가 포크로 찍어 준 사과를 건네받으며 거실 탁자 앞에 앉았다. 어차피 금방 알게 될 테니 버려진 고무장갑에 대해서는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지금 말해봤자 한 소리 들을 게 분명했으니까.


“과일까지 먹을 생각은 없었는데.”


나는 사과를 한 입 베어 먹으며 말했다.


“먹으면 좋지. 일주일 동안 과일은 구경도 못할 걸.”


“과일 안 먹어도 괜찮아. 누가 보면 내가 오지라도 다녀오는 줄 알겠어. 그래도 귤이나 몇 개 사갈까?”


내 말에 엄마가 피식 웃었다.


“어차피 마트에 들렀다 가야돼.”


내가 말을 덧붙였다.


“그래? 그럼 같이 갈까? 장 보러 가야하는데.”


“사야할 거 알려줘요. 내가 배달시킬게.”


“계란도 사야해서 나가야해. 계란은 배달이 안 되니까. 네가 직접 전해주고 가면 나는 안 나가서 좋고.”


엄마의 말에 내가 고개를 저으며 입안에 남은 사과를 삼켰다.


“그냥 같이 가요. 다시 올라왔다 가기 싫어.”


“그럴 줄 알았다.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옷 좀 챙겨 올 테니까.”


엄마가 옷을 가지러 간 사이 과일 그릇을 정리했다. 싱크대 안에 그릇을 넣으며 차라리 과일까지 먹고 한꺼번에 설거지를 할 걸, 하고 생각했다. 비워진 싱크대 안에 빈 그릇을 채워 넣는 일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끝낸 일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만 같아서.


화장실에서 이를 닦고 나와 소파 위에 둔 패딩을 입었다. 굼뜬 움직임으로 외투 주머니 안에서 립글로스를 꺼내 입술에 발랐다. 거울은 필요하지 않았다. 가방을 매고 신발을 신으니 엄마가 두꺼운 겉옷을 입고 나오셨다.

매거진의 이전글어느 날 얼굴에 핀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