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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한 마시멜로우 Dec 18. 2023

자개공장에서 만난 아이


 내 생에 첫 아르바이트는 자개 공장 공순이(그 당시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을 비하하는 말) 생활이었다.

국민학교 6학년을 마치고 중학교를 입학하기 전, 긴~ 겨울방학 때 한 달간 공장 생활을 했다.

어떤 계기로, 누구의 알음으로 그곳에 발을 디뎠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은 펑펑 쏟아지는 눈들로 땅바닥이 미끄러워 종종걸음으로 그곳 양철대문에 들어섰던 것 같다.


 그곳은 정식 공장이 아닌, 집안에서 하는 수공업 정도의 작은 일터였다.

문간방 한 칸을 공장처럼 개조해 자개 펀칭 기계 몇 대와 앉은뱅이 의자, 켭켭히 쌓아 올려진 바구니와 조개껍데기 포대기가 잔뜩 쌓여져 있는 곳이었다.

정식 여공은 딱 한 명밖에 없었다.

그 집 아저씨는 중학교 체육 선생님이셨고, 넉넉한 체격을 가진 사모님이 부업으로 자개 공장을 운영하셨다.


 사모님이 손을 보태도 여공 혼자서 많은 양의 주문을 맞추기 어렸웠는지 나는 한 달을 약속받고 그곳에 추가 투입되었다.   

나와 나이가 같은 여공은 아예 그 집에 눌러살면서 쉴 새 없이 펀칭 기계를 눌러대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가 하는 동작이나 몸짓이 꽤 어른스러워 나보다 한참 언니인 줄 알고 말을 올리며 첫인사를 했다.     


" 안녕하세요~"


어색하면서도 반가웠을, 싫으면서도 좋았을 내 등장에 그 아이는 자신의 옆자리를 부산스럽게 닦아내며 내게 말했다.    

  

" 앉거~"   인사 대신 내뱉은 그녀의 짧은 두 글자는 생각보다 나를 더 긴장시켰다.


 우리는 가공되지 않은 조개껍데기를 여러 가지 무늬(꽃 모양, 나뭇잎 모양, 새 모양)가 새겨진 펀칭 기계에 넣고 누르면 그 모양대로 찍혀 나오는 일을 했다.

게으름 피우지 않고 하루 꼬박 찍어낸 꽃 자개가 바구니에 한가득 채워지고 나면 어김없이 하루해가 저물어갔다.

나는 내 사수의 손놀림이 너무 빠르고 정확해서 경이롭기까지 했는데, 나 역시 좀 하다 보니 (그 애만큼은 아니지만) 손동작이 제법 빨라져 자동으로 숙련공처럼 능숙해졌다.

하지만 사모님이 내 손놀림을 보고 참 잘한다며 입에 침이 마르는 바람에 나는 너무 욕심을 부려 내 왼손 엄지까지 펀칭기계에 넣어버려 손톱이 빠지는 산재사고도 발생했지만 말이다.

   

 그 아이는 여태껏 혼자 일을 하다 처음으로 직장 동료가 생기자 내가 출근하기도 전에 내 자리를 미리 세팅해 놓으며 은근히 나를 기다렸다.   

   

" 지금 오냐? 빨리 와야지~"     


나는 그때 그 아이를 보면서 부모형제가 있고 초라했지만 돌아갈 집이 있는 내 처지가 그렇게 감사할 수 없었다.

난 그 애에게 무슨 사정이 있어 이곳에 붙박이로 지내는지 물어볼 순 없었지만    

  

"니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에둘러 물었고,


"니는?"  


하며 그녀는 되레 대답없이 내게 질문을 되돌려주었다.    


"나는 선생님."  하니까

        

"피익~ 선생님 되기가 쉽다냐?"   

   

그러고선  얼렁뚱땅 다른 얘기로 넘어가 버려 끝내 그 아이의 꿈은 듣지 못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손바닥만 한 라디오를 틀어놓고 노래도 따라 부르고, 내가 전해 준 바깥세상 얘기들과 자잘한 일상을 얘기하며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자유롭게 일하며 지냈다.

사모님이 조물조물 차려주신 점심밥도 맛있었고, 그 집 선생 아저씨가 가끔씩 사 오신 간식도 참 고맙게 잘 먹었다.

나름 지낼 만했던 내 공장 생활로 조금 난처한 일이 있었다면 나중에 그 집 선생 아저씨가 내 중학교 체육 선생님이 되었다는 사실 정도였다.

그때 서로 모른 척하긴 했는데 그 선생님은 진짜 나를 몰라봤을까? 아님 모른 척 하셨을까?   

   

 그녀와의 한 달간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다.

나도 이제 제법 숙련공이 되어 그 아이와 대작할 정도까지 되었는데 약속된 기일이 차자 우린 당연한 듯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 아이는 그때 특별한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 가라~ "  나는 " 그래~"   


그렇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 나는 사모님이 건네준 노란 봉투를 들고 냅다 집으로 뛰었다.

한시라도 빨리 엄마에게 이 봉투를 드리고 싶은 마음에 급했다.


"엄마~ 여~기...."    


엄마는 자연스럽게 그 봉투를 받아쥐었고, 아버지는 ‘허~허..차암~’ 하시며 슬며시 자리를 뜨셨다.


나는 그때 받았던 봉급이 얼마였는지 전혀 가름도 못하겠다.

하지만 그날 우리 집 밥상의 반찬 가짓수가 평소보다 더 늘켜졌고, 내가 매일매일 먹고 싶다 노래를 불렀던 계란프라이가 내 밥 위에만 살포시 얹혀 있었던 것만은 기억난다. 


 지금은 세월이 엄청 흘렀지만 나는 가끔 그 아이와 그 일터가 내 기억 속 어딘가에서 떠다니고 있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그래서일까?

10평도 안된 좁은 일터에서 한 달 동안 나와 공간과 시간을 공유했던 이름도 얼굴도 가물가물한 내 동갑내기 첫 동료의 안부가 궁금해지곤 한다.

어떤 일이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 아닐까?


‘그 애는 얼마나 더 그곳에 머물렀을까?’

‘돈은 많이 벌었을까?

’그 애가 번 돈은 어떻게 쓰였을까?‘

’그 애의 첫 직장동료였던 이 째깐이를 기억하고 있을까?‘......


 어쩌면 그때 나의 등장은 그 아이에게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종류의 작은 위안이 되었을지 모르겠다.

지금 희망하건대, 내가, 루틴화 되어있는 그녀의 일상에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작은 빛처럼 한줄기 숨통이 되었다면 참 다행이겠다. 아주 잠깐이었을지라도....

   

  사진:다음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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