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직장 따라 새롭게 둥지를 튼 우리의 보금자리 ‘교육 연수원’은 oo 리 공원 위에 있었다.
오랫동안 실업자였던 아버지가 어렵사리 구한 직장은 연수원 관리일이었다.
그 곳은 관리원이 기거할 관사와 연수생들을 위한 강당, 다다미 숙소 여러 칸과 식당, 창고, 공중화장실이 구비되어 있었다.
거처할 집이 없어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설움을 겪다 못해 아버지 혼자서나 기거할 좁디좁은 관사에 온 식구가 이사를 했다.
담도 없고 대문도 없는 관사는, 아주 작은 온돌방 하나와 물건더미들을 쌓아놓을 수 있는 다다미방 하나가 전부일 만큼 비좁고 형편없었다.
전기만 겨우 들어올 뿐 수도도 화장실도 없어 살림집 하기엔 턱없는 부족한 곳이지만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우린 그곳에 많지 않은 세간살이를 풀어놓으며 각자 새로운 터전에 적응할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그때 제일 어리고 철부지었던 나는 엄마 치맛폭을 쥐어잡으며,
"엄마~ 우리 꼭 여기서 살아야 해?" 울먹거렸던 기억이 난다.
나중엔 솜씨 좋은 아버지 노력으로 담도 만들고 부엌, 토방도 앉히고 귀퉁이에 수돗가까지 만들어 제법 살림집 모양을 갖추었지만 화장실만은 별 수 없이 공중 화장실을 사용해야 했다.
구멍이 넓은 푸세식 공중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마다 무서움과 찝찝함에 치를 떨었는데 지금도 가끔 꿈에서 그 화장실이 나타나곤 한다.
차츰 시간이 지나자 아버지는 관사를 제법 그럴싸한 전원주택처럼 꾸며, 담에는 넝쿨장미가 우거지고 밑에는 채송화며 봉숭아꽃 같은 화초들이 자라나 지나가는 사람들이 사진을 찍어갈 정도까지 되었다.
넓은 텃밭에는 배추, 무는 기본이고 수수, 옥수수, 토마토, 딸기 같은 채소와 과일들을 없는 것 빼고 다 심으시고 가꾸셨다.
집 안 한편에다 토끼장을 만들어 토끼도 키우고 개, 닭, 오리까지 키웠는데 이것들은 모두 우리 가족 단백질 공급원이 되어주었다.
이렇게 자급자족으로 먹거리를 마련하고 집세며 유지비가 거의 들지 않아 그 적은 월급으로도 일곱 식구가 북적거리며 그래도 살아갔다.
국민학교 2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내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몽땅 이곳에서 보냈다 보면 된다.
하지만 그곳은 공원 위에 딸랑 한 채 자리하고 있어 혼자 집에 있을 때는 무섭고 낯설어서 싫었고,
사춘기 때는 집 같지 않은 집에 살고 있는 내가 창피해서 싫었다.
작은 언니는 이곳을 기억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라며,
"야~ 야~ 그 집 이야기는 고만해라,,, 지금도 힘들다..."
좋은 점도 몇 가지 있었는데, 나중에 그 집 앞에 공공도서관이 생겨 공짜로 도서관을 맘껏 이용할 수 있는 특혜를 누린 점이다.
점차 사람들 왕래 또한 많아져 그리 무섭지만은 않게 되었다.
공기가 좋았고, 공원 놀이터도 있어 나는 마치 그곳을 우리 집 앞마당처럼 원 없이 뛰놀며 지냈다.
매일 계단을 오르내리다 보니 운동량도 많아져, 지금 내 허벅지 근육의 원천이 되어준 것도 그 덕분인 것 같다.
그곳에는 (그때는 높아 보였지만) 그리 높지 않은 돌산이 있었다.
따뜻한 봄날이 되면 주야장천 그곳을 오르내리며 갖가지 재밋거리를 찾아 놀았다.
그때마다 엄마는 바구니와 칼을 쥐어주며 쑥이랑 달래, 보리를 캐오라 하셨고 나는 노는 틈틈이 내 몫을 해냈다.
산 꼭대기에는 군인 초소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을 지키는 군인들이 우리가 올라오면 그렇게나 휘파람을 불어대며 '와보라' 손짓하며 음흉스럽게 굴었다.
무섭기도 했지만 재미있기도 해서 우리는 '엄마야~' 도망갔다 다시 얼굴을 들이미는 밀당을 하며 킥킥대곤 했다.
조금 지나니 이웃집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도서관 관장 식구들이 관리실로 이사 왔고, 언덕 비탈진 곳엔 새로운 얼굴들로 조금씩 채워져 갔다.
덕분에 처음만큼 그리 낯설거나 외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아~ 언제쯤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항상 마음속에 그 마음을 품고 살았다.
내 어린 시절 대부분을 보냈던 그곳 생활도 드디어 끝이 날 때가 왔다.
큰언니 취직과 엄마의 알뜰 결과물로 목돈이 모아지자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우리는 집다운 집을 마련해 여러 칸의 방이 있는 황톳빛 기와집으로 이사를 하게 됐다.
그 설렘과 기쁨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온 식구가 몇 날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며 실실거렸다.
"오메 좋은 그~ 언니야 언니야~ 여기가 여자들 방이여? 우리 여기는 오빠들 못 들어오게 하자"
우리는 그곳에서 아버지와 이별을 했고, 우리 5남매 남은 학창 시절과 청춘을 보냈고, 각자의 짝을 만나 결혼도 했다.
지금 그 집은 올해 하늘의 별이 되신 울 엄마가 홀로 사시다 도로확장 계획으로 허물어졌다.
우리가 살았던 그 집터는 이제 시원스럽게 뚫린 도로가 되었다.
나는 잠시잠깐 그 도로를 바라보며 그때의 설렘과 행복감에 젖어본다.
'우리의 처절한 보금자리여~ 그리고 우리의 꿈같은 보금자리여~, 모두 안~ 녕~'
사진:다음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