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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휸 Aug 09. 2023

한의사가 될래요

두 번째 쓰는 허준 감상문

“왜 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


학교에 들어갈 때도, 인턴을 시작할 때도, 전공의를 시작할 때도 으레 들었던 질문 중 하나다. 비슷한 질문으로 ”왜 소아청소년과를 선택했나요?”도 있다. 면접이나 자기소개서에는 분명히 5분 내, 300자 이내로 답했던 것 같은데, 사실은 직업 선택이 늘 그렇듯 몹시 복잡하고 길며 오묘한 여정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의사가 되고 싶다,라고 마음먹기 시작한 건 아주 어릴 때부터였다. 내가 어릴 때 아빠는 천식으로 한창 고생 중이셨고 종종 천식 흡입기를 들이마시며 아빠를 고쳐주는 의사가 되어 달라고 말씀하셨다. 한껏 슬퍼진 나는 응당 의사가 되어야겠다 마음먹었다. 몇 번이고 확답을 받아 내던 아빠는 다행히 금세 호전되셨고 우리의 약속은 자연스레 흩어졌다.


하지만 본래 그 꿈이 심어질 운명이었을까 아니면 말로써 시작된 걸까. 나는 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고이 키워 가고 있었고 결국 아이들을 보는 게 좋아 소아청소년과 의사의 길을 밟고 있다. 그리고 이 꿈의 여정에는 한의사를 고민하던 시간도 있었다.


1999년, 나는 9살이었으며 공중파조차 일부만 나오던 섬의 아주 작고 낡은 관사에 살고 있었다. 따로 거실은 없었던 지라 드라마를 볼 때면 우리 다섯 가족은 안방 모서리에 빗겨 놓여있던 배불뚝이 티비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그리고 우리의 최애 드라마는 드라마 ’허준‘(양반가의 얼자로 태어난 허준이 스승 유의태를 만나 의술을 배우고 어의가 되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이었다.


한 번은 허준이 왕족의 병을 시일 내에 고치지 못했다 여겨져 작두대에 오른손을 올리고 처벌이 내려질 때까지 대기하는 장면이 있었다. 사실 병은 나아가고 있는 과정이었고 같은 병에 걸린 스승 유의태를 치료하고 해부하면서 체득한 병의 경과를 소신껏 설명하는 역대 명장면이었다. 또 언제나 그렇듯 작두대가 내려치기 전 “멈추시오!”가 들려오며 내관이 달려오리라는 것은 지금이라면 당연히 예측되는 바이지만 그땐 아니었다. 어린 나는 오빠에게 허준이 혹시 오른손을 잃고 동의보감을 왼손으로 쓴 건 아닌지 재차 확인했을 정도였다.


세찬 비로 티비가 먹통이 되고 허준을 보지 못할 뻔했던 어느 날 그 비를 뚫고 아빠가 있는 숙직실로 간 적도 있었다. 또 언젠가 방송국에서 감상문을 공모했을 때에는 어른 대표로 엄마, 아이 대표로 내가 아주 정성껏 써 보냈을 정도로 우리 집은 허준에 몹시 진심이었다.


아홉 살의 내가 어떤 것을 느꼈고 어떤 내용을 써 보냈을까. 한센병 환자들을 진료하기 마다하지 않고 왕자도 가진 것 없는 이의 아이도 가리지 않고 성심껏 진료하는 모습들에서 마주했던 그의 사랑을 써 보내지 않았을까. 지금도 왠지 울적한 날이면 드라마 허준의 기억나는 장면들을 찾아본다. 그리고 사랑 그 안에 있는 의술을 향한 겸손함, 집념과 성실성을 함께 바라본다.


어린이란 아주 좋은 밭과 같아서 어떤 씨앗도 곧잘 발아한다고 믿는다. 아빠와의 약속이 지금 내 길의 씨앗이 되었고 드라마 ‘허준’은 어떤 모습의 의사를 바라고 희망할지에 대해 담긴 씨앗이 되었다. 그저 만들어진 각본이라 해도 좋다. 전공의의 한가운데, 어느새 탐스런 잎들을 피워내기 시작한 그 소중한 씨앗을 품고서 유사작인 듯 아닌 듯 나만의 오묘한 각본을 써 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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