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보를 걸으며
성인이 되고서부터 줄곧 일정한 몸무게를 유지했었던 나는, 2019년 혹독한 인턴 생활을 하면서 인생 최저 몸무게를 기록했다. 인턴 당직의 일과란, 아침 6시부터 다음날 아침 6시까지 온 병원을 쏘다니며 드레싱, 동의서, 채혈 등을 하는 것이었다. 쉬지 않고 울리는 콜에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때맞춰 식사한다는 건 사치였으며 설상가상 동선을 최소화하는 능력은 부족했다. 하루 일과를 마칠 때 어플에 기록된 걸음 수는 최소 10000보~15000보 사이였는데 이는 내 보폭을 생각했을 때 하루 6~9km에 해당하는 정도였다. 이렇게 1년, 평소 운동과 아주 거리가 멀었음에도 도중에 앓는 일 없이 무사히 인턴을 수료했고 나는 그 근근한 체력을 어린 날 등하굣길의 공로라 여겼다.
섬에 살 적에 집에서 학교까지는 당시 내 걸음으로 1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같은 동네에 사는 아이들이 아침 7시쯤 마을 초입인 우리 집 앞에 모였고 오빠와 나는 집을 나서 아이들과 함께 등교를 시작했다. 이제와 지도로 찾아보니 집부터 학교까지 편도로 꼬박 2km가 측정되는데 초등학교 1학년 아이의 보폭을 생각하면 무려 10000보에 해당하는 거리였다. 학교까지 왕복 4km, 3년 내내 아주 궂은날을 제외하고는 부모님은 차로 태워주시는 법이 없었다. 대신 이따금 지나가는 차들이 있으면 목청껏 태워달라 소리 질러 짧게라도 얻어 타는 재미가 있었다. 경운기도 예외는 아니었고 굽이진 비포장도로라 한껏 덜컹거렸어도 어떻게든 옹기종기 끼어 앉아 쉴 새 없이 즐거워했다.
하지만 그 10리 길은 오로지 친구들과 함께일 때에만 아름다웠다. 길 한편으로 야트막한 산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이름 모를 무덤들이 즐비해 있었고, 어쩌다 혼자 돌아오는 날이 되면 종종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던 오빠가 괜스레 원망스러웠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대상은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바구니 할머니’였다. 낫, 호미 등을 바구니에 넣어 다니며 아이들에게 이유 없이 소리를 지르시던 어떤 할머니를 두고 누군가 만들어낸 헛된 이야기였지만, 혼자 집으로 돌아가다 할머니를 마주쳤을 때의 공포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집을 목전에 두고 다시 학교 쪽으로 돌아갈까 수없이 고민했었고, 내달리는 것보다 도리어 크게 인사를 해서 할머니에게 잘 보이기로(?) 결론을 내렸다. 당연히 아무런 일도 없었고 등하굣길의 막연했던 공포감도 옅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즐겁기도 무섭기도 했던 그 10리 길을 졸업하며, 체력뿐 아니라 그 시절 내게 풍요히 베풀어진 사랑과 친절, 켜켜이 쌓아 올린 친구들과의 추억을 선물로 받았다. 그리고 인턴 시절, 보폭은 넓어졌지만 더 알량해진 마음으로 고되고 서러운 만보를 걸으며 그 선물의 존재를 여실히 느꼈다. 사실 요즘 같으면 초등학생 혼자 그 인적 드문 거리를 걸으며 아무 차나 얻어 탄다는 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모두 힘을 합쳐 섬의 아이들을 키워내는 것이 당연했다. 누구네 집 아이라도 태워주고, 먹여주고, 돌봐주었다. 투박하지만 따뜻했던 그 작은 섬이 알 수 없는 때에 알 수 없는 방식으로 힘이 되곤 했다.
고작 1년의 인턴 시절을 두고 힘들었다, 어리광 피우는 건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소아청소년과 의사로서 수많은 어린이들을 평생 만날 테고 대부분 행복하고 때로는 고민스럽고 어쩌다 가슴 아플 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때마다 중요한 사실ㅡ어린이가 자라나면서 그 안에 심긴 모든 좋은 것도 함께 자라나서 아주 큰 열매를 맺는다ㅡ을 잊지 않고, 내가 경험하고 믿고 있는 좋은 것을 아이들에게 나눠 주고 싶다. 앞니가 없어도 활짝 웃던, 작은 섬 안에서 아주 행복했던 마르고 까만 어린이를 언제까지고 추억할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