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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휸 Aug 04. 2023

나의 강아지들

귀엽고 따뜻한 모든 것

나는 귀엽고 따뜻한 모든 것을 좋아하고,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 주로 어린이에 대해 글을 짓고, 강아지를 떠올리며 그림을 그린다. 어떻게 좋은 소아청소년과 의사로 살 지를 고민해 나가며, 내가 매일 마주하는 어린이들, 수십 년 전 어울려 놀았던 어린이들, 무엇보다 ‘어린이로서의 나’를 즐거이 만나고 때로 그 안에서 답을 찾았더랬다. 그리고 오늘은 내게 위로를 주는 또 다른 존재, 강아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강아지를 키우지도 그렇다고 많이 만나보지도 못했던 나는, 집집마다 강아지 한 마리씩은 키우던 섬으로 이사를 갔다. 단짝친구 은선이네(가명)도 황구 한 마리가 대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 황구는 저보다 작달만 했던 초등학교 1학년을 아주 얕잡아 보았던 게 분명했다. 사실 당시에는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기보다는 아주 이르거나 아주 늦지 않은 시간이면 친한 친구네 집 마당까지는 들어서도 되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다. 하지만 황구는 내가 보이는 순간부터 으르렁거렸고, 나는 담벼락 밖에서 황구의 눈을 피한 채 은선이를 애타게 부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은선이의 비호 속에 마당으로 들어서는 순간까지도, 황구는 앞니조차 없는 내게 쉬지 않고 송곳니를 자랑했다.


한편 같은 마을에 민수는(가명) 백구를 키웠고 이름은 정글북에 나오는 모글리였다. 과연 이름만큼 늑대의 후손이면서도 사람처럼 굴었는데, 다 같이 우르르 모여 등교할 적에 종종 민수를 마을 초입까지 배웅해 주고 멋있게 제 집으로 돌아가곤 했었다. 내게도 친절히 대해 주었던 모글리는, 황구에 다소 질려 버린 와중에 강아지가 마냥 무서운 존재는 아니라는 걸 보여주었다. 모글리 생일 파티를 기념해 우리끼리 과자를 사서 축하를 한 적도 있는데 사실 누구를 위한 파티였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렇게 어렴풋이 강아지의 매력을 느낀 채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님의 직장을 따라 다시 도시로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친구네 집에서 마주친 시츄나 말티즈를 안아 보며, 또 티비에 보이는 앙증맞은 강아지를 보며, 나는 강아지를 아주 갈망하게 되었다. 하루 종일 인터넷에서 강아지의 종에 대해 정리해 놓은 자료를 보기도 했는데 그렇게 내린 나의 최종 선택은 ‘셔틀랜드 쉽독’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나만의 최종 선택이었다. 엄마 아빠는 셔틀랜드 쉽독은 커녕 강아지 자체를 꽤 오래 반대하셨다. 얼마나 지났을까. 6학년의 어느 날 기적처럼 조건부 승낙이 떨어졌다. 겨울방학 동안 아침 7시에 삼 남매 모두 일어나서 제시간에 아침을 먹고 방 정리를 하고 정해진 공부를 하는 조건이었다. 단 한 번도 빠뜨리지 않았는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일어나지 못하던 오빠를 열심히 깨웠던 기억은 있기에 아무래도 약속을 지키려는 그 모습이 갸륵하게 보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드디어, 우리도 강아지를 키우게 된 것이다.


사실 셔틀랜드 쉽독은 아니더라도 꼬물대는 아기 강아지까지는 기대했었다. 하지만 내게 온 강아지는 피부병 귓병을 가진, 2살 이상 추정되는 요크셔테리어. 누군가 혼자 사시는 이웃 아주머니 집 앞에 매어놓고 가버린 강아지였다. 아주머니는 '해피'라는 이름을 붙이고 한 달 정도 보호하며 주인을 찾으셨지만 끝내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고, 아이들로 북적이는 가정에서 외롭지 않게 지내길 바라셨다. 그렇게 때마침 삼 남매인 우리 집에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해피는 얼굴과 다리는 금빛, 몸에는 고르게 반짝이는 은빛 털이 덮여있는 아주 아주 예쁜 강아지로, 사람을 무척 좋아했다. 특히 나를 제일 좋아했다. 학교에서 돌아와 거실에 대자로 누워있노라면 꼭 내 왼쪽 겨드랑이를 북북 긁다가 그 사이로 야무지게 똬리를 틀었고, 빼꼼 턱을 괸 채 더없이 애틋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한번 주인에게 버림받았던 기억 때문인지 내가 어디로 움직이더라도 토독토독 걸어와 곁을 붙이던 해피는, 작고 외로운 강아지였다.


다행히 해피를 주셨던 아주머니께서 발달장애 아동들을 가르치는 센터를 운영하셨고, 가족들이 없는 낮에는 아주머니와 아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마침 센터가 우리 남매들 학교 바로 옆에 있어서, 각자 등하교 때 돌아가며 해피를 그곳에 맡기고 데려오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해피와 함께 한 시간이 1년여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센터 수업 시간에 해피는 교실 외 공간에 머물렀는데, 누군가 들어와 해피를 그대로 데리고 가버렸다. 전단지를 붙이고 주변 곳곳을 수소문했지만, 결국 우리는 그렇게 영영 해피를 잃어버렸다.


내 인생 가장 큰 이별을 중학교 2학년 때 해피를 통해 경험하게 되었다. 돌아서면 울기 바빴고 해피의 물건들은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아주머니는 너무 미안해하시며 다른 강아지를 안고 우리 집에 오셨다. 모견 부견을 함께 키우는 시골 친구네가 새끼 강아지를 여럿 보았는데 그중에 해피를 가장 많이 닮고 활발하고 건강해 보이는 아이를 젖을 떼자마자 데려왔다고 하셨다.


닮은 것이라곤 까만 콩인지 모를 눈 코뿐. 해피같이 반짝이고 윤이 나는 금빛 은빛 털은 한 터럭도 찾아볼 수가 없었고 대신 뻣뻣하고 부스스한 새까만 털들만 가득했다. 철없던 동생은 귀엽다며 마냥 좋아했지만 내겐 해피만 한 강아지는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엄마 품을 떠나 꼬리를 축 늘어뜨린 채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 잠들어버린 강아지를 보며, 내 사랑을 주지 못해 미안하고 불쌍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부디 이 강아지를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밤마다 기도했고, 결과적으로 그 기도는 너무나 잘 이루어져 그로부터 15년간 내 소중한 막내 동생으로 지내게 되었다.


강아지의 이름은 ‘장봉자’로 지었다. 나는 김 씨이지만 꽤 오래전부터 엄마 혼자 장 씨인 게 몹시 쓸쓸해 보였어서, 성이 다른 자매가 되기로 선택했다. 봉자라는 이름 역시 강아지 이름을 화려하게 지으면 빨리 이별을 한다는 말을 알게 된 뒤, 고민 끝에 작정하고 지은 것이었다. 제 이름을 지어주고 처음 불러준 사람이라 그랬을까. 봉자도 가족 중에 나를 제일 좋아했다. 모두가 잠든 서늘한 새벽, 좌식 책상을 펴 앉아 공부를 하고 있으면 봉자는 이내 양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나지막이 라디오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오른손으로는 문제를 풀면서 왼손으로는 줄곧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고 봉자는 자울자울 잠에 들었다. 그리고 딱 그 몸집만큼 내 무릎은 따뜻했다.




그렇게 봉자와 꼭 붙어 공부하던 수많은 밤을 지나 나는 누구보다 바쁘고 빠르게 쏘다니는 인턴이 되었다. 본가에서 병원은 아주 먼 데다 이삼일 걸러 밤샘 당직이었기에 봉자를 자주 보러 갈 수 없었다. 1년차가 되고 나서는 더 바빠졌고, 그 사이 봉자의 걸음은 느려졌다. 그리고 봉자의 시간도 점점 빨라졌다.


그해 늦가을의 어느 날, 봉자는 갑자기 토를 하면서 먹지를 못했다. 신부전을 진단받고 매일 통원하며 수액치료를 받았는데, 점차 회복되는가 싶더니 며칠 뒤부터 증상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옆 도시의 보다 큰 병원의 진료를 권유받았고 그렇게 금요일 저녁, 봉자는 입원을 했다. 다행히 토요일은 당직 근무가 아니었고 일요일 당직만 마치면 월요일부터는 꿈에 그리던 하반기 휴가였다. 봉자와 꼭 붙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휴가까지 단 이틀만 참으면 되었지만, 금요일 저녁부터 알 수 없는 불안이 느껴졌고, 토요일 아침 나는 결국 봉자가 입원한 병원으로 3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내려갔다. 잠시지만 봉자를 만나고, 다시 저녁에는 병원으로 돌아와 다음날 당직을 설 계획이었다.


하지만 입원실이라고 하는 유리 케이지 속에서 봉자를 마주했을 때, 나는 계획 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동생에게 들었던 봉자의 상태와는 확연히 달랐다. 삐쩍 말라버린 봉자는 엉거주춤 힘겹게 앉아 고개만 수그린 채 끔뻑댈 뿐이었다. 더 이상 희망적인 소견은 없었다. 그 시간 나는, 오로지 우리가 함께 했던 매일의 새벽 때와 같이 쓰다듬어 줄 수밖에 없었다. 동물병원의 배려 속에 우리는 대기실 어느 한 구석 유리창가에 앉아 얼마간의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고,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네게 얼마나 고마웠는지, 아주 오래도록 천천히 말해 주었다. 봉자도 이런 내 마음을 다 안다는 듯이 한결 편안히 안겨 있었다.


우리의 마지막 몇 시간은 믿을 수 없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곧 저녁이 되어 내가 기차역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그 찰나에, 봉자는 야트막한 숨을 멈춰버렸다. 그 작고 작은 강아지가 내가 돌아올 때까지 죽을힘을 다해 버틴 것이었다. 늘 내 무릎을 덥혀 주며 새벽 공부에 덩달아 잠을 설치던 내 막내 동생 봉자는 그렇게 내 무릎 위에서 강아지별로 떠나갔다.


내가 다리를 어떻게 꼬아 앉아도 꾸역꾸역 제 몸을 맞춰 자던 봉자였는데, 다리 저리다고 땀난다고 짓궂게 봉자를 내려놓지 말걸 그랬다. 그렇게 좋아하는 산책 뭐 힘들다고 더 많이 시켜줄걸 그랬다. 그렇게 힘겹게 기다리는 줄 알았으면 금요일 저녁부터 만나러 갈 걸 그랬다. 엄마 강아지를 떠나 많이 두려웠을 텐데 처음 우리 집에 온 날부터 아껴주고 사랑해 줄걸 그랬다. 봉자가 떠난 직후 내게 가장 크게 남은 것은 그득한 후회였다.


하지만 삼 년이 지난 지금, 후회보다는 고마운 마음을 더 기억하려 한다. 영문도 모르고 미움을 받던 아기 강아지 때부터 조건 없이 나를 사랑해 주었고, 혼자 깨어 공부하느라 어쩌면 외로운 새벽 함께 있어 주었으며, 바쁘다며 드문 드문 얼굴을 비춰도 한결같이 반겨 주었다. 지금 내가 귀엽고 따뜻한 모든 것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 사랑을 베풀 수 있는 힘은, 어쩌면 어린 내 곁에 바짝 붙어 한시도 사랑을 주지 않은 적이 없었던 나의 강아지들 덕분이었다. 어느 날 다시 나의 강아지들을 한 데 만나게 된다면, 이 고마운 마음 가득 담아 내 겨드랑이와 무릎 사이에 취향껏, 그리고 원껏 곁을 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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