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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휸 Aug 01. 2023

언제고 꺼내볼 이야기

관용의 미덕

집안의 아이들이 학교에 입학하던 해마다 설날은 유난히 분주했고 으레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덕담도 바삐 오갔다. 이 말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한 반의 동기로서 서로를 관용으로 대하고 연대감과 책임감을 가지라는 뜻이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이 '관용'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젊은 남자 선생님은 이전 선생님이 개인 사정으로 그만두시고, 1학년 1학기 중간부터 우리를 담당하셨다. 나는 선생님을 많이 좋아해서 수업 시간 참여도, 숙제에도 항상 진심이었는데 점점 선생님의 칭찬을 당연하게 여겼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반 종수(가명)가 수업 중에 장난을 치다가 아이들에게 침을 뱉는 일이 있었고 선생님은 종수를 꾸짖고 벌을 주셨으며 종수는 모두에게 사과를 했다. 하지만 평소에 종수에게 짓궂은 장난을 많이 당했던 나를 포함한 아이들은 이전의 일들까지 신이 나서 일러바쳤는데, 선생님은 종수에게 주었으면 하는 벌이 뭔지 각자 써내라고 하셨다. 나는 이때다 싶어 의기양양하게 종수에게 주고 싶은 벌을 두 개 이상 써냈던 걸로 기억하는데, 선생님은 되려 각자가 쓴 벌을 각자에게 내리셨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이제껏 칭찬만 하셨던 선생님이 공부도 숙제도 열심히 하고 말도 잘 듣는 내게 벌을 내리시다니. 우리는 세모눈이 되어 종수를 쏘아보며 의자도 들고 손도 들었다. 조금 지나 선생님은 이 이상한 벌을 드디어 멈추셨고 침을 뱉은 종수에게도, 같은 반 친구에게 무자비하게 벌을 써 내린 아이들에게도 결론을 지으셨다. 서로 입장을 바꿔 생각할 줄 알고 용서할 줄 아는 어린이가 되라는 것.


말 그대로 몸으로 체득한 경험이기 때문일까.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임에도 생생히 기억하고 한동안은 잘 실천하며 살았다고 믿지만, 그럼에도 인턴-레지던트 동기는 달랐다. 수련 약 5년 동안, 두 달을 함께 일을 하고서 끝내 선을 그어버린 동기도 있었다. "그래도 동기인데......" 수없이 되뇌던 말이었지만 다양한 출신, 나이, 성향의 사람들이 밤을 새우고 밥을 못 먹고 밤낮없이 일에 치이는 극한의 상황에 놓이게 되면 모든 기준은 내가 되는 것이었다. 어느 날은 "그래도 동기인데 나한테 이러는 거냐"며 한껏 날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서로를 불쌍하고 안쓰럽게 여긴 것이 분명했다. 초짜 인턴 시절 동맥 채혈, 비위관 삽입 등이 한 번에 되지 않아 병실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단체 톡방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노라면 시간 되는 어느 누구라도 대신 완수해 주었다. 그중에 나 혼자 연당(연속당직)을 서는 건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키도 눈매도 성격도 비슷하고 죽이 잘 맞는 인턴 동기가 있었는데, 너무도 비슷해서였을까. 그녀는 함께 소아청소년과로 지원하자는 나의 제안에 걸려들어 지금은 같은 의국에서 4년째 운명을 함께 하는 중이다. 할 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았던 인턴-1년차 전공의 시절을 그녀와 함께 종종 회상하고 있으면 자칫 지금은 꽤 멋지고 성숙한 전공의로 성장해 있는 것 같이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사실은 가족과 동료들, 선배들, 환자들과 보호자들 등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수한 관용을 베풀어 주었고, 그리고 지금 흘러가는 이 순간도 그렇다는 것. 두고두고 이 글을 꺼내 읽으며 작고 낡은 그 교실을 오래도록 잊지 않는 너른 어른으로 여물기를 스스로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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