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코 봄이로구나
** <나의 첫사랑은 생활한복을 입었다>(1)에 이어 읽으시기를 권고합니다.
2019년 말 나는 인턴 수료를 코 앞에 둔 '말턴'이자 소아청소년과 예비 1년차였고, 동시에 COVID 19가 출현하였다. 아이들이 마스크를 쓰고, 외출을 삼가고, 등원 등교를 멈추며, 덩달아 소아청소년과의 주 질환이었던 호흡기 바이러스는 후퇴하는 듯 보였다.
"언젠가는 소아 환자만 하루 100명 응급실에 왔었어."
"침상이 없어 대기 의자까지 줄지어 앉아 수액치료를 받고 갔지."
선배들은 텅 비어있는 응급실 소아 구역이 원래는 어떤 곳이었는지 종종 얘기해 주었는데, 고작 1년 전이었음에도 마치 설화처럼 느껴졌더랬다. 때맞춰 입원 케이스도 같이 줄어들었으며 폐렴이나 모세기관지염 등의 환아가 입원하는 일은 더더욱 드물었다. 간혹 이런 호흡기감염 환아가 있으면 선배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코로나 베이비'인 나와 동기를 데려가 귀하디 귀한 청진을 시켜주었다.
하지만 기존 바이러스들도 아주 잠시 몸을 사리고 있을 뿐이었다. 2년차이던 2021년부터 슬금슬금 시절을 찾아가더니 이제는 더 강력하게 복귀하여 본래 제 유행 기간에 상관없이 고르게도 말썽을 피우는 중이다. 외래에는 아찔한 기침 소리가 줄지어 들리고, 입원 케이스에서도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이미 외래에서 한차례 진료를 보고 입원이 결정되었더라도 병실에 입실을 하게 되면 다시 한번 담당 전공의 또는 당직 전공의가 문진과 진찰을 하면서 변화되거나 추가된 사항이 있는지 확인하게 되는데, 협조도가 낮은 영유아를 진찰하는 것이 아주 오래 걸리면서도 진땀을 빼는 일이었다. 입원까지 하는 아이들의 대부분은 고열이 심하거나 잘 못 먹거나 기침이 심해 잘 못 자는 등 전신 컨디션이 좋지 않은 가운데, 이미 여러 가지 치료로 한껏 예민해져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이들에게 흰 가운은 호감도가 몹시 낮고, 병원이라는 장소 자체가 낯설고 두렵기까지 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경험을 쌓으며 아주 조금씩 터득해 온 요령이 있었다.
"ㅇㅇ이 안녕!" 일단 최대한 밝게,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인사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으로 청진기를 꺼내기만 한 채로 "ㅇㅇ이 이거 많이 해봤지? 여보세요-만 할까?" 하고 물으면 대부분 일단 우는 것을 보류하고 지그시 바라보며 무언의 긍정을 한다. 조금 불안하면 곧바로 아이 가슴에 가져가기보다 "엄마 한 번, 아빠 한 번, 선생님도 한 번, 이제는 ㅇㅇ이 차례네?"하고 은근슬쩍 순서가 돌아온 것처럼 청진기를 가져간다. 만약 여기서부터 울기 시작한다면 보호자와 상의를 해서 아이들 기호에 맞춘 보상을 제공할지 고려해야 하지만, 많은 수에서 이 단계까지는 잘 넘어간다. 경우에 따라 청진을 오래 해야 하는 아이인데 울음이 임박했다 느끼면 하나부터 열까지 아주 크고 천천히 세면서 조금 시간을 버는 수가 있다. 여기까지 아이에게 좋은 인상을 보였다면 귀를 보고 목 안을 보는 것도 '어쩌면' 순조롭게 끝낼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 부족한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후 단계는 그저 욕심을 버리고 빠르게 진찰하는 것이 최선인 듯하다.
가끔 비슷한 나이대지만 협조도가 좋은 환아들이 마치 요정처럼 도와주는 경우도 있다. 아침 회진 전 진찰을 하러 가면 종종 다인실의 아이들끼리 금세 친해져 사이좋게 놀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병실에 들어서며 나름대로 환하게 ‘이모 미소'를 지어보지만, 어제도 오늘도 나는 ㅇㅇ이에게 불길한 예감을 주는 흰 가운의 이모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때 중요한 것은 이 아이들 중에 보다 나이가 있고 협조도가 좋았던 아이의 진찰을 먼저 시작하는 것이다. "ㅁㅁ이는 몇 살인데 이렇게 잘해?" ㅁㅁ이가 의기양양하게 손가락을 셈하다 결국 몇 살로 답을 하더라도 ㅁㅁ이는 이제 언니다, 또는 형아다,라고 공식적으로 선포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옆에 있던 ㅇㅇ이가 이 모든 모습을 바라보고 질세라 울음을 참고 단 한 번 진찰을 잘 마치게 된다면, 경험상 퇴원일 즈음에는 어서 진찰하라고 스스로 통통배를 보여줄 거라 기대해 봐도 좋다.
아이들이란 그렇다. 바로 직전까지 사이좋게 어울려 놀고 간식을 나눠 먹던 친구 형제자매라도 그렇기에 더 비교하고 경쟁하는 대상인 된다. 무려 생활한복을 입은 채 처음 마주했던 나의 첫사랑 정민이(가명)도 내게 그런 존재였다.
정민이와는 이사 첫날 배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고서부터 아주 빠르게 친해졌다. 각자 나름의 도시에서 살다 같은 날 이사를 왔다는 점이 통했고 부모님들끼리도 교직 생활을 하며 알음알음 아는 사이였으며 정민이의 누나와 나의 오빠도 같은 반 친구사이였다.
정민이의 짧고 까만 머리카락은 귀엽게 곱슬거렸고, 웃을 때면 작고 처진 눈이 한층 더 길어지며 동글동글한 광대가 솟아났다. 주로 노란색, 주황색, 갈색이 들어간 생활한복을 즐겨 입었는데 새뜻한 색들과 흰 피부가 참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또 배려심이 넘쳤던 정민이는 집에 초대해 본인이 평소 즐겨 보지 않는 웨딩피치를 틀어 같이 봐주었고, 아끼던 열쇠고리도 흔쾌히 가지게 해 주었다.
무엇보다 정민이가 좋아하고 잘했던 일들이 생생히 기억나는데, 그건 아마 정민이에 대해 묘한 질투, 나아가 시기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민이는 또랑하고 카랑한 목소리로 노래를 참 잘 불렀고 다 함께 민요와 창 등을 특별활동으로 배워 대회에 나갔을 때 그 많은 친구 누나 형들을 제치고 유일한 독무대의 주인공이자 합창 때의 메인 보컬로 선발되었다. 반면 수줍은 아기 염소였던 나의 파트는 언제나 '다 함께'를 벗어나지 못했다. 또 그림까지 잘 그렸던 정민이를 두고서 혹시 그림 숙제를 같은 학교 선생님이던 정민이의 어머니가 도와준 건 아닐까, 하고 시기심을 넘어 단단히 삐뚤어진 마음을 품었던 적도 있었다. 어느 날은 정민이와 둘이 학예회에서 동화 구연을 하게 되었는데 외운 그대로 줄줄 읊고 끝내기에 바빴던 나와 달리, 정민이는 아주 즐겁게 모두를 주목시키고 웃기며 무대를 마쳤다. 그날만큼은 정민이가 그렇게 얄미워 보일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반에서 피아노를 제일 잘 다루어서 정민이와 아이들의 노래에 반주를 담당했고, 끼는 없어도 구연할 동화를 빠짐없이 외우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한번 부러워하기 시작한 이상 온 마음을 다해 정민이를 칭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좋아했다가, 부러워했다가, 얄미웠다가 하는 사이 우리는 자라났고 초등학교 3학년을 마치고 새로 발령 난 부모님들의 직장을 따라 헤어지게 되었다.
앞서 정민이와 내가 미래를 약속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스무 살 때 재회를 기약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민이가 다시 돌아가는 도시에는 큰 놀이공원이 있었고, 우리는 10년이 지나 스무 살이 되던 해 1월 1일 아침 9시에 그 놀이공원 정문 앞에서 보기로 약속했다. 당시 생각에 스무 살이 되면 부모님 없이 그 놀이공원에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종이에까지 써서 나름의 문서화를 하였을 정도로 아주 신중을 기해 약속을 정하였다.
우리는 헤어진 뒤 초등학교 6학년 가을까지 편지와 이메일을 주고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은 희미해져 갔다. 그리고 약속한 날에, 나는 그곳에 가지 않았다. 이제와 문득 정민이는 그 시간 그 장소에 갔을까, 물어보고 싶기도 하다. 혹시 지금도 노래를 즐겨 부르는지, 생활한복을 즐겨 입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정민이의 연락처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을 테고 손쉽게 안부를 물어볼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앙증맞은 키에 생활한복을 입은 채 성큼성큼 무대로 나와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노래 부르던, 봄같이 새초롬한 남자애를 두고두고 간직하고 싶었다.
봄에 만나 봄에 헤어진, 나에게 분명코 봄이었던 어린 정민이에게-
나는 20여 년이 지나도 여전히 염소처럼 노래하고 있다고, 노래는 정민이 너처럼 타고나는 거라고 늦었지만 온전히 칭찬해주고 싶다. 대신에 나는 그림을 열심히 그리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틈새 자랑을 곁들여야겠다. 무엇보다도 질투 많고 시기심 많았던, 조금은 피곤했을 어린이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어 고마웠다고 토닥이고 싶다. 말했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너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고 알려주고도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