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에게 정말 필요한 것
소아청소년과는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입원 시에 보호자 상주가 필수다. 하지만 입원을 권고했을 때 상주 보호자들이 마땅하지 않아 망설이는 경우가 많다. 엄마, 아빠가 어렵다면 양가 조부모님, 이모, 고모, 삼촌이 동참되기도 하지만 이마저도 중간에 교대하는 경우가 잦다. 곧, 아이가 아프면 온 가족이 비상이고 출동 대기며 혹시 아이의 형제자매라도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다행히 나는 어린 시절 입원한 적이 없었으나 입원 외에도 아이들이 자라날 때 보호자가 필요한 경우는 꽤 많았다. 입학식, 졸업식, 학부모 참관 수업, 때로는 운동화와 소풍 때조차 어른들을 필요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다른 학교에서 근무하셨기 때문에 오시기가 몹시 어려웠고 대부분은 우리에게 양해를 구하셨다. 그래도 초등학교 입학식 때에는 아빠가 오셨는데, 17명의 아이들 중 아빠가 온 집은 오로지 나뿐, 모두 엄마 또는 할머니가 오셨다. 아빠도 겨우 짬을 내서 오신 것일 테고 또 가뜩이나 말주변도 없는 와중에 친구 어머니들 틈에서 얼마나 민망했을까 싶지만, 교실 맨 뒤 가운데 까만 양복을 입은 아빠는 돌아볼수록 점점 튀어 보였다.
입학식 이후 학기마다 소풍, 운동회가 있었지만 부모님은 당연히 오지 못하셨다. 특히 섬의 초등학교는 학년마다 한 반씩 있었기 때문에 소풍을 전 학년이 다 같이 갔고, 섬 자체의 행사처럼 가족들도 함께 따라가곤 했다. 식사도 으레 가족끼리 했는데, 나만 오빠를 애타게 찾아 단둘이 돗자리를 펴고 조용히 김밥을 먹노라면, 엄마와 할머니가 오신 친구네는 음식도 즐거움도 한결 풍요로워 보였더랬다.
입학식이나 소풍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단짝 은선이네를 종종 놀러 갔는데, 은선이의 어머니는 항상 반짝반짝 가구를 닦거나 계절에 맞춰 옥수수나 감자 고구마를 삶다 우리를 맞아 주셨다. '엄마'만이 해줄 수 있는 토스트 등을 간식으로 내주셨으며 우리가 먹는 동안 은선이의 가방을 열어 알림장을 확인하고 다음 날을 미리 준비해 주셨다. 학교 들어간 순간부터 '스스로 알아서 하기'가 원칙이었던 우리 집을 떠올렸을 때, 그 모습이 낯설면서도 묘하게 부러웠다.
친구들과 놀다 유난히 빨리 흩어진 날이면, 혼자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와 숙제를 하고 알림장을 챙겨 다음날 가방을 쌌다. 냉장고의 사과나 감을 곧잘 깎았는데 엄마가 하는 대로 마요네즈에 버무려 먹고 귤도 몽땅 까먹었다. 부지런히 미숫가루도 타서 절반은 마시고 절반은 냉장고 구석에 숨겨 얼려두었다. 간식을 해결한 뒤에는 286 컴퓨터로 게임을 하고 재미도 없는 티비로 배구나 볼링을 꾸역꾸역 보았다. 너무 심심해 지쳐갈 때쯤이면 바닥에 엎드려 몇 장이고 그림을 그렸고, 결국 오른손 중지 마디가 울퉁불퉁 튀어나올 정도였다. 굳은살이 자라는 만큼 나도 자라났고, 혼자 할 수 있는 것들도 점점 더 많아졌다. 단단한 책임감은 덤이었다.
어느새 어린이는 훌쩍 어른이 되었다. 이제 어린이의 추억은 되려 희미해지고 어른의 편에 서 있는 날 바라본다. 지금의 나는 내 아침밥도 챙겨 먹지 않는데, 아침이면 먹기 싫다 깨작이는 어린이 셋을 밥, 국 먹여 학교에 보내고 출근까지 했을 부모님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또 주말이면 말끝마다 심심하다 응석 부리는 어린이였음이 생생한데, 쉬는 날이면 이부자리에서 나오지도 않는 어른이 되어 부모님이 어떻게 아이 셋을 데리고 이곳저곳 놀러 다니셨는지 새삼 놀랄 뿐이었다.
때로 보호자들이 입원을 망설이거나 보호자 교대를 하면서 아이에게 미안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직 아이를 낳아보지 않아서 온전히 이해한다 말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어린 나와 지금의 나를 번갈아 생각하면 아이가 조금 다르다 조금 외롭다 느낀다고 해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그 마음이면 괜찮을 거라 말씀드리고 싶다. 순간마다 사랑만 충분했다면 어린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모든 걸 이해하리라, 내 짤막한 경험을 말씀드리고 싶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면 좋겠지만, 어린이에게는 단 한 사람이라도 온전히 사랑하고 바르게 가르치는 어른이 필요하다 생각한다. 그리고 그 어른은 아기가 이 사회의 어른으로 자라게 하는 참으로 거룩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감히 위로를 드리고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