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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휸 Aug 13. 2023

어른이의 독서

제때 쓰는 그림일기


매일 나의 하루는 컴퓨터의 전원을 켜면서 시작된다. 진료 프로그램 창을 열고 차트를 보고 간밤의 검사 결과와 임상 기록을 확인한다. 이때 궁금증이 생기고 교과서로 해결되지 않을 때면 웹으로 논문을 찾아보거나 세계 각지의 석학들이 유튜브에 공유해 놓은 강의 영상을 찾아본다. 아, 영상 속 처음 뵙는 교수님이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세상을 살고 있다. 그리고 내가 어릴 때도 이런 세상이었다면 공부를 훨씬 더 열심히 했을 거라고 부질없는 생각을 해보지만, 금세 알고리즘이 띄워 주는 강아지 영상에 눈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인터넷만 있다면 지식뿐 아니라 놀거리도 무한하다.


하지만 이십여 년 전 어린이들에게 놀거리는 그렇게 특별한 것이 없었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였고 몇 안 되는 티비 만화를 챙겨 보거나 그저 좋아하는 책을 읽는 것이 여가 시간의 주된 일과였다. 특히 삽화가 있는 동화책을 좋아했는데, 잠들기 전 읽으면 나른하게 상상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쉽게 넘기기 쉬운 한국의 역사 만화 전집은 한 손으로 부단히 간식 먹을 때에 적절했다. 책장 앞에서 고민하고 선택하는 즐거움은 또 하나의 생각 거리였고 추억 거리였다.


학교에 입학하고서부터는 아동 문학을 즐겨 읽었다. 마냥 아름답고 행복했던 동화와는 다르게 좌절과 실패, 가족 간의 갈등 같은 조금은 어둡고 슬프고 고민할 내용들이 담겨 있었는데 내 마음은 그 감정에 일찍이 동했다. 말하자면 독서의 이유식이었다. 그리고 나아가 긴 세월의 온갖 갈등이 집약된 책, 박영규 작가님의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대부분의 내용은 몹시도 어려웠고, 나는 왕마다 기재되어 있는 가계도와, 함께 실어진 왕실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주로 읽었다. 한창 드라마 여인천하, 장희빈 등을 보고 열광했을 시절이었다. 책 속에 쓰인 인물들의 정보 너머로 나만의 궁중 암투를 상상으로 덧대곤 했다. 그러다 상상력이 모자를 때면 집 옆 도서관에 가 야사를 찾았다. 도서관 가장 위층에 자리한 서고에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덜 찾는 역사, 종교 분야 책이 모여 있었는데 나는 그 쿰쿰한 냄새를 맡으면 왠지 배가 아릿했지만 이 책 저 책 오래도록 행복한 고민을 즐기며 꼬박 열 권씩 채워 빌려왔다.


이 조선 왕가에 대한 애정은 초등학생 때 궁중 암투극을 연재하며 꽃을 피웠다. 당시 주니어네이버 사이트의 가상 소설 게시판에, 어린 시절 친구가 각각 왕비와 후궁이 되어 경쟁을 해 나가는 나름의 소설을 연재했다. 팬픽이 우세한 그곳에서 내 소설은 빠르게 묻히곤 했고, 결국 조금 이르게 두 친구를 화해시키고 근근한 연재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무언가 써 내려가는 즐거움을 알아버린 덕분인지 중학생이 되면서부터는 학교에서 일기를 검사하지 않았는데도 잠들기 전 오래도록 즐거이 일기를 썼다. 할 말이 많은 날에는 하루 2번씩 쓰기도 했다. 읽기에서 쓰기로, 자연스럽게 확장되는 시간이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도 읽고 쓰는 것은 나의 즐거움이었다. 늘 잠이 부족해 일기를 괴발개발 마무리도 짓지 못한 채 잠든 적이 많았어도 매일매일 나의 즐거움을 소중히 대했다. 꿈 때문에 이과를 선택했으나 제일 좋아하는 과목은 단연코 문학이었으며 어느 수업보다도 제일 또렷해졌다. 쉬는 시간이면 아직 배우지 않은 문학 교과서 뒷 내용을 슬금슬금 읽기 바빴고 전교에서 문학 과목을 비롯해 언어 영역만큼은 제일 자신 있었다.


하지만 수능에서의 언어 영역이란 짧은 시간에 엄청난 속도로 긴 지문을 읽고 문제를 푸는 일종의 미션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읽는다기보다는 훑는다는 개념이 맞을 것이고, 이 훈련이 반복되어 가는 가운데 내게 진득한 독서의 개념은 희미해졌다. 의학 공부를 하면서도 독서의 질은 제자리걸음이었다. 교수님의 강의 내용이 담긴 ppt와 수업 시간에 정리한 요약본만 봐도 시험 때까지 시일이 촉박했다. 나름 읽고 싶은 책을 자리에 가져다 놓고 쉬는 시간마다 읽어 갔지만, 10분 내로 읽고 덮어야 하기에 대부분 짧은 글이 엮어진 책만 선택되었다. 어느새 줄글을 오래도록 읽기보다 시간에 쫓기는 독서를 하게 되는 것이었다. 스마트폰을 쓰면서 이 습관은 더욱더 강화되었고, 글을 헐렁하게 읽다가 중요한 내용을 빠뜨리거나 이해가 잘 되지 않아 두세 번 글의 처음으로 되돌아가곤 했다. 전공의가 되어 긴 병력을 섬세하게 파악한 뒤 간결하고 쉽게 보호자에게 설명을 해야 하는데, 가뜩이나 경험이 짧은 저년차 때에는 종종 어려움에 부딪히는 경우가 많았다. 말하기 듣기 쓰기 읽기는 어른이 되어서도 끊이지 않고 배워야 하는 것이었다.


읽고 쓰기를 참 좋아했던 나를 돌아보고 마주하며 이 모든 것을 다시 배워나가고 있는 요즘,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나도 모르게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느낌이다. 마치 어느 노래를 즐겨 들었다는 사실조차 스르르 잊고 살다, 우연히 다시 듣게 되었을 때 느끼는 행복과도 비슷하다. 이제 짬이 날 때면 마냥 뜬구름 같던 감정과 생각들을 글로 써 내려간다. 그 과정 속에서 행복, 설렘, 불안, 슬픔 모두 명확해지고 신기하게도 좋은 감정은 커지고 안 좋은 감정은 되려 작아진다. 이제 와 그간의 일기를 밀려 쓰고는 있지만, 덕분에 단단히 깨달았으니 앞으로는 제때에 쓰는 글쓰기를 하리라 다짐한다. 기쁨과 슬픔 어느 것 하나 묵히거나 버려두지 않고 매 순간마다 모든 감정을 당당히 마주하리라 오늘의 일기로써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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