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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진 May 08. 2021

체리 묘목에서 희망이 싹튼다

체리 잼도 만들어야지


체리 묘목에서 초록빛 보드라운 새싹이 돋는다. 4월에 앙상한 묘목을 심었다. 그날 이후 매일 들여다보면서 싹을 확인한다. 작년 여름에 이사한 집 정원 가생이엔 관리되지 않은 이름 모르는 나무 몇 그루와 풀이 무성했다. 우리도 정원을 열심히 가꾸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걸 주인집 올리버가 일찌감치 파악하고 풀 뽑기 귀찮지 않도록 나무 부스러기를 깔아줬다. 그때 한쪽면은 텃밭으로 쓸 요량으로 남겨두라고 했고. 10년쯤 된 과실나무가 있었으면 좋을 텐데, 아쉬웠다. 꽃만 피는 나무보다는 열매가 열리는 게 좋으니까.


예전 살던 곳은 뒷집에도 앞집에도 체리나무가 있었다. 아름드리 체리나무에선 봄마다 하얀 꽃이 눈부셨다. 실컷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야 할 것 같았다. 아마도 그때부턴가 보다. 집을 사면 꼭 체리나무를 심어야겠다고. 올해 초, 2년 후 내가 꿈꾸는 모습에서도 독일에서 집을 산다면 꼭 체리 나무를 심고 싶다고 썼다. 마음에 품고 있거나 글로 써두면 무의식이 그 방향으로 저절로 움직이는 모양이다. 남편한테도 체리나무를 심고 싶은데 묘목을 어디서 사야 하지, 이런 얘기를 무심히 한 날 체리 묘목을 딱 만났다.


마트 알디에 우연히 간 날, 계산대로 가는 길목에서 남편이 체리 묘목을 발견했다. 마트에서 이런 것까지 팔 줄은 몰랐다. 물론 알디엔 식료품뿐 아니라 없는 게 없을 정도로 가구부터 책, 문구류, 컴퓨터까지 오만가지가 매번 교체되면서 판다. 그래도 이렇게 쉽게 체리묘목을 만날 줄이야. 가격은 3.99유로(5천 원)로 엄청 저렴하다. 체리뿐 아니라 사과, 배, 밤까지 있다. 생각하지 않았으면 있어도 몰랐을 것이 눈에 딱 띈 거다. 80cm 정도 되는 작은 묘목이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게 신기하고 믿기지 않아서 "이거 진짜 체리나무야?" "이렇게 작은 걸 심으면 정말 체리가 열리는 거야?" 의심하다가 감탄하면서 두 개를 샀다. 


체리도 신맛과 단맛으로 나뉜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고 당연히 단맛으로 골랐다. 최소 3m는 떨어뜨려서 심으란다. 크게 자랄 걸 염두하면 당연히 그래야지. 나무는 처음 심는 거라, 그러고 보니 집엔 삽도 없다. 남편이 비료랑 비옥한 흙을 사러 가다가 산책에서 돌아오는 주인집 올리버를 만났다. 체리 나무를 심을 건데 삽 좀 빌려달라고, 나무 심는데 필요한 재료를 사러 간다니까 자기 집에 다 있다고 해서 그냥 돌아왔다. 소란스러워서 나가보니 그새 올리버가 삽을 들고 우리 집 정원에 서 있다. 진디 중앙 양 옆으로 적당히 떨어뜨려 두 곳의 땅을 파고 그 안에 물을 가득 채우고 묘목을 세운 후 흙으로 덮으면 끝이다. 쉽게 끝났다. 게다가 나무는 두 그루를 심는 게 바람 불면 꽃가루가 날려 수분도 잘 되어 좋단다.


앞집의 Purebure 사장도 와 있다. 자기 집에 20년 된 체리나무가 있다면서. 이제야 체리 나무답다면서. 와, 20년이나. 잠시 실망했다. 그래도 싹이 돋고 가지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겠다. 올리버 부인 라모네는 체리가 열리면 자기한테도 나눠주란다. 당연하지! 자기 집엔 재작년에 심은 나무에서 체리 한 개를 따먹었다면서. 이웃과 나눠먹을 정도로 체리가 주체할 수 없이 열린다는 상상만으로도 흐뭇해진다. 남편은 나무를 심었을 뿐인데 희망 같은 게 생긴단다. 무성해질 나무를 상상하면. 희망이란 건 그런 건가 보다. 지금 당장은 작은 묘목에서 시작되는 것! 이사하고 첫 번째 봄에, 더 늦기 전에 심은 일은 참 잘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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