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유치원 적응기
딸은 첫 한 달간 매일 엄마 얼굴을 그려왔다. 유치원에 다녀온 어느 날 딸은 담담하게 말한다. “엄마, 독일 유치원 재미없어. 가고 싶지 않아.” 이유를 물으니 말도 안 통하고. 친구도 없고. 3시간 동안 혼자 퍼즐만 맞추었단다. 3이라는 숫자는 아이가 느끼기에 그만큼 오랫동안 혼자 퍼즐을 했다는 것일 거다. 독일 유치원은 자율이 많이 주어진다. 획일적으로 뭔가를 하는 날이 드물다. 일정이 없는 날도 많다. 아침은 집에서 먹는데도 매일 간식 도시락을 싸가서 먹는 건 뻘쭘하고 낯설다. 자율은 자유가 주어졌을 때 스스로 뭔가를 하는 힘이다. 자율이 갑자기 주어지면 감당하기 어렵다. 선생도 아이가 뭔가를 요청하지 않는 이상 크게 개입하지 않으니 아이는 당황스럽다.
유치원은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다. 꼬맹이들이 놀 때 충분한 그늘이 되어줄 나무가 많은 아기자기한 놀이터가 안쪽에 있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한 반 16명 정원에 담임은 Ingel(60대 여자 선생님)과 Daniel(30대 남자 선생님)이다. 딸은 2층 무지개 반인데 4세부터 6세까지 다양한 연령이 한 반을 구성하는 게 특이하다. 선생님 복장이 가장 놀라운데 한 여름엔 모두 반바지와 운동화 차림으로 아이들과 언제라도 바닥에 널브러져 놀 편한 차림이다.
맨 처음 독일어로 한나(내게 독일어 수업을 해준 친구)에게 물어본 말은 "우리 아이 잘 부탁해요"라는 말이다. 한나가 해준 말이 날 놀라게 했다. 독일에선 그런 말을 쓰지 않는단다. 선생이 아이를 잘 보살피는 일은 선생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오히려 실례라고. 한국에서 입버릇처럼 아무 생각 없이 썼던 “선생님, 잘 부탁드려요”는 선생을 못 믿어서라기보다는 내 아이가 부족한 게 많으니 잘 부탁드린다는 부모의 걱정 섞인 말이다. 특수 상황인 만큼 당부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힘든 시기에 딸에게 적절한 도움을 준 다니엘과 유치원에서 유일하게 영어가 가능했던 피트가에게 고맙다. 내가 만난 선생님은 모두 친절했고 꼭 필요한 순간에 도움을 주었다. 따로 사적인 관계는 갖지 않았지만 중요한 순간엔 충분히 상의했다. 언어적 어려움이 컸던 첫 6개월, 몇 번의 고비가 떠오른다.
말썽꾸러기 남자아이가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자꾸 공격한다. 목격한 친구들이 대신 선생님께 고해주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엔 난감하고 억울하다. 아이가 하소연하길래 "싫어. 저리 가!" 등 자신을 보호하고 거절하는 독일어를 연습했다. 안되면 한국말을 해도 괜찮다고. 1학기가 끝나고 부모 상담에서 딸이 '거절'이란 걸 하게 됐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아이는 거절할 뿐 아니라 거절당해도 괜찮다는 것을 배운듯했다. 여자 친구들은 수시로 마음이 변한다. 친하게 놀았다가 금세 토라지기도 하니까.
딸은 유독 놀고 싶은 여자 친구가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하는 방식으로 '같이 놀자'는 표시로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우리 친구 할까'했는데 '부'라며 엄지손가락을 뒤집어서 거절을 표시한다. 자꾸 거절당하니 마음이 힘들다. 말이 잘 통하지 않으니 다른 아이 입장에서 오랫동안 놀기에 한계가 있을 때다. 물론 아이들은 말이 필요 없이 잘 놀기도 하지만. 다니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이의 언어적 어려움을 알고 있다.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안다. 재인이는 늘 단짝 친구가 있었고 친구와 노는 걸 좋아하는 아이다. 누구랑 놀고 싶은데 거절당하니 속상해하고 유치원에 가기 싫어한다. 친구와 놀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
아이의 특성과 공격당하거나 친구랑 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어려움을 이야기할 때, 다니엘은 엄마인 나에게 깊이 공감하며 이렇게 말했다. “잘 지켜보겠다. 말해주어 고맙다.” 안심될 뿐 아니라 큰 감동이었다. 말뿐 아니라 아이를 정말 잘 지켜보고(아이가 부담스러울 만큼) 다른 반 친구들과 놀 수 있게 권하거나 연결시켜주고 그날 하루 어땠는지 말해주었다. 아이가 잘 적응하도록 돕는 건 선생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해주어 고마웠다. 아이에겐 언어를 배울 시간이 필요했고 시간이 지나 친한 친구가 생겼다. 우린 훌륭한 팀워크를 발휘했다. 졸업식 날 선물로 받은 앨범엔 일 년간 아이의 유치원 적응사가 담겼다. 침울했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졸업식 날은 한국에서 단짝 친구와 놀던 때와 다름없이 환한 웃음으로 온종일 놀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