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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진 Apr 05. 2019

마흔두 번 째에서야 의미를 챙기는

아무래도 특별한 생일


탁에 봄이 왔다. 남편은 쇠고기 미역국을 손수 끓이고 노란 튤립 꽃을 유리병에 꽂아 준비했다. 노란 잎이 하나 둘 떨어질 무렵에 기다란 초록잎 사이로 분홍 심지가 단단하게 자리 잡은 새로운 화분이 왔다. 직접 만든 케이크에 하얀 초를 꽂아 밝히니 기분이 환해진다. 음력 생일과 호적상 생일의 혼돈으로 두 번의 생일을 치렀다. 오누이는 엄마가 좋아하는 초콜릿을 사고 편지를 쓰고 그림을 그린 정성스러운 선물도 잔잔한 감동이다. 


주민등록상 내 생일은 3월 1일이다. 다섯 번째 딸이라 실망한 것치고는 겨우 일주일 늦게 신고된 날짜다. 독일 온 첫 해에 주인 할머님은 가족 모두의 생일을 남편에게 물으셨다. 남편은 생일을 챙기실 줄은 모르고 서류상 생일을 알려드렸다. 주인집 할아버지 피터와 할머니 마리타는 한 집에서 위아래층에 산다. 작년 여름 78세 생신을 맞은 마리타는 다음 주 큰 수술을 앞두고 병원에서 검사를 받느라 일주일간 입원했다가 토요일에 퇴원했다. 내 생일날 병원에서 전화하셔서 축하해주셨다. 유진, 생일 축하해. 모든 일이 잘 되고 좋길 바란다는 메시지다.


매번 3월 1일엔 피터와 마리타는 선물을 들고 우리 집에 오셔서 축하해주신다. 나뿐 아니라 오누이와 남편 생일까지 꼭 챙긴다. 물론 우리도 할아버지와 할머니 생신을 함께 보낸다. 마리타가 집에 돌아온 후 피터는 선물을 준비했는데 마리타 다리가 많이 부어서 걷는 게 여의치 않다고 집으로 와 달라고 했다. 조각 케이크를 준비해서 온 식구 아래층으로 출동했다. 탁자 위에 곱게 포장된 선물이 기다린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선물 포장지를 뜯는다. 아주 낯설다. 누가 내 생일을 기억하는 것도 부끄럽고 선물을 받는 건 더 민망하다.


친구도 생일날 밤에 선물을 들고 방문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생일 축하 노래까지 불러주면서. 다음 주 카페에서 커피와 케이크를 먹자고 약속을 잡았다. 독일은 선물을 받으면 답례로 차와 케이크를 대접하는 게 예의다. 아이들은 생일날 머핀이나 달달한 간식을 학교에 가져가서 나눠먹고 축하를 듬뿍 받는다. 물론 친구를 초대하는 생일 파티가 연중 중요한 행사이기도 하고. 생각해보니 내가 어릴 땐 생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한국에선 특별한 것 없이 지냈다. 매년 맞는 생일이 뭐 그렇게 중요할까 싶어서.

 



내가 태어난 사건보다 엄마의 죽음이 더 생각나는 날이다. 그 젊은 서른일곱이라는 나이에 아이를  다섯이나 낳고 일찍 절명한 엄마가 불쌍했다. 워낙 몸이 허약하고 손에 물 한 번 안 묻힌 막내딸로 귀하게 자란 딸이 12형제의 장남에게 시집을 왔으니 그 시절 아들 낳고 싶은 욕심도 이해된다. 아이를 셋까지만 낳았어도 일찍 죽진 않았을 텐데… 그럼 나란 존재는 없었을 거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무작정 기뻐하기엔 뭔가 이상한 날이다. 


특별한 의미를 찾지 못했는데 독일에 와서야 생일의 의미를 되새긴다. 작년까지만 해도 생일을 유독 챙기는 독일의 생일 문화가 생경했다. 친구에게 "독일 사람에겐 생일이 왜 그렇게 중요해?" 물었더니만 되레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너한테 중요한 날은 언제야?" 딱히 떠오르는 날이 없다. 신조는 매일을 특별하게 잘 보내는 게 중요하지. 무슨 날만 특별하게 보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그건 궁색한 핑계다. 생각처럼 매일 특별하게 보내진 못하니까. 


재차 생일을 확인하는 친구에게 혹시라도 기억하고 축하할까 봐, 별로 중요하지 않아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생일이 없었다면 넌 이 세상에 없었잖아. 엄청 중요한 날이지." 그런다. 듣고 보니 그렇다. 그래서 생일 전엔 축하하지 않는 모양이다. 생일날 이후에만 내가 존재하게 된 거니까. 아픈 마리타를 보니 나이 들수록 생일은 더 특별해 보인다. 살아있는 사람만 누리는 게 생일이다. 죽으면 생일은 자동으로 잊히고 제삿날로 기억할 테니까. 황송하리만치 축하를 받으니 우울감도 사라진다. 마흔두 번째에서야 의미를 챙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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