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바이 사립학교 평가기관 KHDA에 따르면, 두바이에 사는 학생들의 국적은 약 180여개라 한다. 그래서 두바이 국제학교는 다양한 국적의 아이들 속에서, 다양성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만큼 낯섦이 가득한 곳일 테니, 그곳에서 심장이 요동칠 만큼 떨릴 아이들을 생각하니 나도 손이 덜덜 떨렸다.
떨지 말자.
한껏 치장을 하고, 남편도 잘 입지 않던 정장을 입고, 아이들의 두 손을 꼭 잡고, 두바이 국제 학교로 첫발을 내디뎠다.
두바이 첫 등교날
그나마 영어가 조금은 친숙한 6살 첫째보다, 한마디도 못하는 4살 꼬맹이가 의사소통은 될지 걱정이었다.
화장실 갈 때는 pee, 배고플 때는 hungry, 졸리면 sleepy, 예는 yes, 아니요는 no라고 몇 번을 연습했지만,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그래도울지 않고 금발머리 친구의 손을 잡고 씩씩하게 들어가는 아이를 보니 대견함과 안쓰러움에 괜스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잘 있다는 선생님의 메시지에 맘을 놓았다.
안심을 하며 집에 돌아온 것도 잠시.
둘째 아이가 울다 지쳐 잠들었다고 데리러 오라는 학교의 연락을 받았다. 한국 어린이집에서는 자면 낮잠 이불에 재워 줬을 텐데, 이곳이 두바이인 것이 실감이 난다. 이때만 해도 나는 최대속도 80km/h를 못 넘는 초보운전자 중에서도 상초보라, 남편이 시속 120km/h로 달려 두 아이 모두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 이 정도면 첫 날치고는 괜찮다.'
하지만 문제는 다음날부터였다.
학교에서 화장실 가고 싶다는 말을 못 한 둘째는 결국 실수를 하고 말았고, 아이 신발까지 젖었다며 또 데리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아, 여벌옷은 미리 보냈는데 신발까지는 생각을 못했다. 내심 학교에 여분 신발 하나 없을까 원망도 했지만, 이것저것 생각하고 말고의 여유가 없이 운전대를 잡았다. 운전 상초보인 나였지만, 내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학교로 달려갔다.
저 멀리 교실에서 줄무늬 반바지에 교복티셔츠를 입고, 맨발로 걸어 나오는 우리 둘째가 보였다. 한국에선 어린이집 선생님 손길에 늘 정돈된 모습으로 하원하던 아이였는데, 저렇게 맨발로 나오는 모습을 보니 왈칵 눈물이 날것 같았다.
그런데 또 엄마 왔다고 배시시 웃는 아이를 보니, 집에서는 누구보다 말괄량이인 녀석이 말도 못하고 순한 양처럼 웃고만 있는 모습에 어이가 없어 나도 웃음이 났다.
이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아이손을 잡고 신발을 신겨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 3개월 동안, 아니 정확히는 3.5개월 동안 우리 둘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에 교실 앞에서 울고 불며, 내 다리를 붙잡고 떨어지지 않았다.
애착인형도 보내보고, 사탕도 쥐어줘 보고 온갖 편법을 써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신규 아이들을 담당하는 학교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아이를 행복하게 교실로 들여보낸다는 3단계, '엄마는 갈거야', '사랑해', '뽀뽀'를 몰라서 못하는게 아니다. 아이는 악을 쓰며 울고, 담임 선생님은 아이를 안고, 보조 선생님은 아이가 위험하게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문 앞을 막고, 나는 눈물을 훔치며, 교실 옆에 숨어 아이가 괜찮은지 지켜보고. 이런 상황에 저 3단계를 하다가는 아이와 부딪혀 눈물의 결과만 나올 것 같았다.
당시만 해도, 우리 유치원에서는 유일한 한국인 엄마였던 나는, 그렇게 매일 우는 아이의, 우는 한국인 엄마로 꽤 유명세를 떨쳤다.
커다란 애착인형과 함께 등원
영어고뭐고, 울지만 말아라!
매일 주문을 외우며, 나의 두바이 국제학교 학부모 생활은 그렇게 계속되었다. 울고, 보내고, 나도 울고. 이렇게 규칙적이기도 쉽지 않은데 일관된 하루하루를 보냈다. 강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학교였어도, 나는 아이와 씨름을 하느라 온 몸이 땀으로 젖었다. 그래도 구글 번역기까지 들고, 아이에게 한국어로 얘기해도 된다고 아이를 끝없이 달래준 미스 애킨스 선생님덕에 아이가 학교에 있는 동안은 걱정하지 않으려했다.
그리고 100일후, 우리 꼬맹이는 특별한 계기도 없이 드디어 미소 띤 얼굴로 나에게 손을 흔들며 미스 애킨스의 손을 잡고 교실로 들어갔다. 정말 아무 계기도 없었다. 옆에 있던 소피아 엄마, 아리아나 엄마, 시마 엄마가 모두 박수를 쳐줬다.
후련함보다는 멍했다. 혹시나 다시 울까봐 바로 떠나지 못하고, 창문으로 바라보다, 웃고있는 아이를 보고 발길을 돌렸다. 백일의 기적은 신생아에게만 있는게 아니었다. 계절은 바뀌었고, 그렇게 4살의 기나긴 적응기에도 끝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