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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마 김작가 Jul 12. 2020

여름엔 행복해져라

이안이의 여름방학

소년에게 소녀가 큰 튜브를 가지고 다가왔다. 쓱 내밀자 소년이 획 올랐다. 소녀도 튜브에 오르자 상반신만 튜브에 몸을 걸친 소년이 해변을 등지고 물장구를 쳤다. 푸르다 못해 눈부신, 깊이를 알 수 없는 망망대해로 아이들은 나아갔다. 멀어지는 소년과 소녀를 바라보았다. 아이가 만드는 물보라에 그 모습이 사라졌다 나타났다 했다. 파도에 출렁출렁 춤추며 나아갔다.


로마에서 태어난 소년이 여름을 위해 머문 아말피에서 소녀를 만났다. 소년은 2주 뒤 7살이 된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모두가 여름의 로맨스를 가슴에 품고 있다는데 소년에게도 그 반짝거리는 기억을 담을 주머니가 생겼다. 아이에게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외치려다 삼켰다.


소년의 여름을 방해해선 안된다.


아이는 스스로 방향을 틀어 바다를 등지고 해변을 향해 다리를 움직였다. 돌아오는 아이의 얼굴은 짙고 아름다운 구릿빛이다.





해변에 도착한 우리에게 아말피 소녀, 젬마가 먼저 말을 걸었다.


_지금 하는 말, 어느 나라 말이에요?


이탈리아 아이들은 보통 중국말이냐고 묻는데 어디 말이라니 소녀의 금발은 바다가 젖어 있었다.

_한국말이야.
_이태리 말 한국말 모두 하는 거예요? 얘도?
_응 우린 로마에서 왔어. 얜 로마에서 태어났고.
_난 젬마 야. 넌?

건너 선베드에 겨우 걸음마를 땐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네 딸이야? 하고 눈짓하자 그녀가 웃으며 그렇다고 눈빛을 보냈다. 그 사이 두 아이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소녀는 말을 하면서 몇 번이나 잠수를 했다. 물속에서 빙그르 돌고 고개를 내밀 때마다 바다가 우리에게 튀었다. 아직 수영이 능숙하지 못한 이안이는 팔에 튜브를 하고 있었다. 해변 마을의 그 어디에도 이안이 또래에 팔에 튜브를 한 아이는 없었다. 팔 튜브가 도시에서 온 아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소녀를 바라보던 아이가 말했다.

_그거 알아? 나 이거 없어도 수영할 수 있어. (거짓말이다) 이거 그냥 엄마가 해 준거야. (거짓말이다) 엄마, 이거 빼줘요. (너 이거 없이 수영 못하잖아!)

팔 튜브를 뺀 아이가 손으로 코를 막고 잠수를 했다. 가라앉는다.

_어? 이상하네, 원래 잘 됐는데.

소녀는 까르르 웃으며 미끄러지듯 물속으로 들어가 아름답게 회전했다.

_한국말 듣고 싶어.
_’ 난 이안이야.’ 이건 한국말로 내 이름은 이안이라는 뜻이야.

이야기를 나누던 소녀가 나에게 물었다.

_또 언제 여기(해변)에 와요?
_내일은 다른 곳에 가고... 수요일에 올 거야.



해 질 녘이 되고 해수욕장이 폐장을 준비할 때가 되어서야 물놀이가 끝이 났다. 숙소에서 쉬고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 마을 광장으로 나섰다. 그때 누군가 이안이를 불렀다. 젬마였다. 생일 파티에 초대를 받았다는 소녀는 어깨가 드러난 꽃무늬 옷을 차려입었다. 헤어지며 인사했다.

_이안, 수요일에 봐.

수요일 아침 해변에서 이안이는 팔 튜브없이  손으로 코를 막지도 않고 수영하는 연습을 했다. 코로 입으로 잔뜩 물을 들이켜더니 괴로운 듯 울었다. 엄마!!! 엄마가 코를 못 막게 하니까!! 아이 참!!! 겨우 진정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젬마가 왔다.

_너 좀 전에 왜 울었어?
_... 엄마가 내가 하고 싶지 않을 걸 계속하라고 해서.
_그게 뭔데?

답을 하려다 날 바라봤다. 이내 고개를 돌리더니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기억 안 나.


소녀가 큰 튜브를 내밀었다. 둘은 바다로 나아갔다. 아이는 혼자 몇 번 더 코를 막지 않고 바닷물에 얼굴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이내 물 안에서 두 손을 뒤로하고 물장구를 쳤다.


마치 어릴 적 읽었던 빛바랜 만화책 속 이야기 같았다. 도시의 소년이 여름을 보낸 바닷가 마을에서 만난 소녀. 흑백의 그림인데도 색깔이 칠해진 듯 눈앞에 그려졌었다. 두근두근 만화책을 덮어도 가슴이 뛰었다. 수영복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며 걷는 소년 소녀의 장면이 좋아 내 것도 아닌 빌린 만화책에서 티 안 나게 그 페이지를 찢어 책상 귀퉁이에 붙였다.


나의 추억이 아님에도 설렜다.
나의 기억이 아님에도 그리웠다.


그런 여름이 ‘나의 여름’인 너는 오죽할까?


우린 언제나 같이 같은 모습의 여름을 담았다. 이제 아이는 내가 알 수 없는, 나에게 들려주지 않는 이야기를 자신의 여름에 담으려 한다. 이 여름을 진짜 만나게 되면 서운하고 허전하고 가슴 아플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벅찼다. 아이의 표정이 아름다워졌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한 바닷가 고등학교에서 내준 여름방학 숙제에서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여름은 가슴 아프고 황홀해야만 한다고 이야기한다. 슬프고 영혼이 혼란스러워도 걱정하지 말라고, 여름이라는 계절엔 자유롭고 행복해야 한다고 부끄러움 없이 춤을 추라고 한다.

아아.... 아이는 빛나는 계절 속에 있다.



written by iandos



https://youtu.be/X2xWaV07TjE

유튜브@로마가족


아래는 첫 책에도 소개한 적 있는 2015년 이탈리아의 작은 바닷가 마을 페르모의 체사레 카타 선생님이 내 준 여름방학 숙제입니다. 어떻게 숙제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그의 인터뷰도 덧붙입니다.


Compiti per l’estate 2015

1. 가끔 아침에 혼자 해변을 산책하라.

햇빛이 물에 반사되는 것을 보고 네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생각하라. 행복해져라.

2. 올해 우리가 함께 익혔던 새로운 단어들을 사용해 보라.

더 많은 걸 말할 수 있게 되면 더 많은 걸 생각할 수 있게 되고, 더 많은 걸 생각할 수 있게 되면 더 자유로워진다.

3. 최대한 책을 많이 읽어라. 하지만 읽어야 하기 때문에 읽지는 마라.

여름은 모험과 꿈을 북돋우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 날아다니는 제비 같은 기분이 들 거다. 독서는 최고의 반항이다. (무엇을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면, 나를 찾아와라)

4. 네게 부정적인, 혹은 공허한 느낌을 들게 하는 것, 상황, 사람들을 피하라.

자극이 되는 상황과 너를 풍요롭게 하고, 너를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의 너를 인정하는 사람들을 찾아라.

5. 슬프거나 겁이 나더라도 걱정하지 마라.

여름은 영혼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다. 너의 느낌을 이야기하는 방법으로 일기를 써 봐라. (네가 수락한다면, 개학 후에 함께 읽어보자)

6. 부끄러움 없이 춤을 추어라.

집 근처의 댄스 플로어에서, 너의 방에서 혼자 추어도 된다. 여름은 무조건 춤이다. 춤을 출 수 있을 때, 추지 않는 건 어리석다.

7. 최소한 한 번은 해가 뜨는 것을 보아라.

말없이 숨을 쉬어라. 눈을 감고 감사함을 느껴라.

8. 스포츠 활동을 많이 해라.

9. 너를 황홀하게 만드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 사람에게 최대한 진심으로 정중하게 말해라.

상대가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너의 짝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해한다면 2015년의 여름은 황금 같은 시간이 될 것이다. (이게 잘 되지 않았다면 8번으로 돌아가라.)

10. 우리 수업에서 필기했던 것을 다시 훑어보라.

우리가 읽고 배웠던 것들을 너에게 일어났던 일들과 비교해 보라.

11. 햇빛처럼 행복하고 바다처럼 길들일 수 없는 사람이 되어라.

12. 욕하지 마라.

늘 매너를 지키고 친절하게 행동하라.

13. 언어 능력을 기르고 꿈꾸는 능력을 늘리기 위해 가슴 아픈 대화가 나오는 영화를 보아라(가능하다면 영어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고 영화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너의 여름을 살고 경험하며 다시 한번 너만의 영화를 살아보아라.

14. 빛나는 햇빛 속이나 뜨거운 여름밤에 네 삶이 어떻게 될 수 있는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꿈꾸어 보아라.

여름에는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꿈을 좇기 위해서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라.

15. 친절해라.



카타 선생님과의 대화

- 이 목록에 영감을 준 것은?
카타는 이 숙제가 여름의 ‘마법’ 때문에 만든 것이라고 했다. “나는 여름 그 자체에 영감을 받았습니다. 특별하고 마법 같은 순간이죠. 학교에서 공부하고 익힌 것이 우리 존재에 얼마나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지를 깊이 이해하기 좋은 때입니다."

- 그동안 어떻게 여름방학을 보냈나?
“몇 년 전 내가 학생이었을 때의 여름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스포츠, 수영, 연애, 춤, 로맨스, 꿈 등으로 가득했지요.” 그는 독서가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고 말했다. “이제까지 여름에 읽었던 책들이 그 이후의 나날들을 위한 깨달음을 주었고, 문제, 기쁨,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을 대면하는 새로운 실마리를 주었죠. 그때 샘솟은 문학과 예술에 대한 흥미는 결코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카타는 숙제 2번에서 학생들에게 ‘우리가 함께 배웠던 새로운 단어들을 써보라’고 제안했다. 이런 단어들이다.

1. 철학 (지혜에 대한 사랑)
2. 아가페 (절대적인 사랑)
3. 무의식
4. 향수
5. 존재론적인
6. 허무주의
7. 유아론
8. 해석학
9. 인문학
10. 부조리주의

카타는 학생들에게 ‘가슴 아픈 대화’가 나오는 영화를 보라고 했다. 그가 좋아하는 영화들은 다음과 같다. ‘티파니에서 아침을’, ‘사랑과 추억’, ‘노트북’, ‘원 데이’,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샤도우랜드’.

카타 자신도 이번 여름에 큰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는 첫 소설을 쓰고, 그가 감독하는 페스티벌에 셰익스피어 연극 다섯 편을 올리고, 에세이를 몇 개 쓰려고 한다. 하지만 즉흥적인 일을 할 시간도 남겨두려 한다.


여름이란 우리가 계획하는 능력을 넘어서는 예상할 수 없는 아름다운 것 같아요.

나는 세세하게 다 계획해두지 않고 여름의 황금 같은 지평선이 내게 가져다줄 것을 기다리고 싶어요.

(인터뷰 출처: 허핑턴포스트)



#아말피를 영상으로 만나보세요.


https://youtu.be/Y80v2n_3jRQ


#여름을 기록한 다른 이야기도 만나보세요.

https://brunch.co.kr/@mamaian/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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