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알게 될 거야
엄마, 내가 게이일까?
해질녘 수영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이안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안이 너머로 구름과 하늘이 붉게 물들자 마치 정지 버튼을 누른 듯 거리의 사람들이 일제히 멈춰 서서 하늘을 향해 휴대폰을 높게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시선이 하늘로 향하지 않은 이는 나와 이안 둘 뿐이었다. 발걸음을 멈추고 우린 서로를 바라보았다.
엄마, 게이가 뭐야?
“그.. 키포(KIPO)에서 키포가 밴슨에게 고백을 하는데 밴슨이 “난 게이야.” 이렇게 대답을 해. 그리고 대드엔디아(DEAD ENDIA)에 나오는 로건이란 바니도 게이야.”
이안이의 질문에 많은 생각이 오갔다. 벌써부터? 만 9세에 이런 내용을 접해도 되는 건가? (KIPO는 이탈리아 넷플릭스에선 만 7세 이상 관람가이다.) 너무 빠른 것 아닌가? 저 애니메이션들이 미국 콘텐츠라서 그곳에선 자연스러울 수 있지만 한국이나 이탈리아 정서에는 너무 빠른 것 아닐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렇게 빠르다고 볼 수도 없을 것 같다. 만화책 베르사유의 장미와 카드캡쳐체리에도 동성애 코드가 등장하고 중학교 시절 아주 유명했던 만화 [아기와 나]의 작가 라가와 마리모의 고전 [뉴욕 뉴욕]과 박희정 작가의 [호텔 아프리카]를 통해 동성애를 접한 때의 나의 나이는 지금의 이안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국이 전통적인 유교 사상으로 보수적이라고 하지만 사랑이나 표현에 있어 개방적으로 알려진 이탈리아도 가톨릭 국가로서 이혼이나 동성애에 관해서 자유롭게 노출하는 나라는 아니다. 그리고 다른 유럽국들과 국경이 인접한 북부에 비해 남부는 더 보수적이다.
[ 2020년 이탈리아 성교육 관련 취재글]
https://brunch.co.kr/@mamaian/233
여하튼, 로마에 나의 유년 시절처럼 만화책 대여점이 있는 것도 아니니 다양한 문화(?)를 접할 기회도 없고 심지어 원장 수녀님이 계시는 초등학교를 다니는 이안이의 일상에 ‘게이’의 등장은 낯설었다.
“게이는 남자인데 남자를 사랑하는 사람이야.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기도 하니까 여자가 여자를 사랑할 수도 있겠지? 그럴 땐 레즈비언이라고 해. 그리고 남자인데 남자 여자를 둘 다 사랑할 수도 있어. 물론, 여자인데 여자 남자를 다 사랑할 수도 있지. 이럴 땐 바이 섹슈얼이라고 해. 흠…그리고 남자인데 자신이 여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여자인데 자신이 남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 이건 게이랑 레즈비언이랑은 또 다른데….”
그럼… 엄마, 내가 게이일까?
“왜 그렇게 생각해?”
“나는 레오나르도를 보면 멋지다고 생각하거든.”
“레오나르도는 엄마가 보기에도 멋져. 엄마는 여자잖아. 그런데 어떤 여자를 보면 너무 멋지고 예뻐. 부러울 때도 있어. 예쁘니까 계속 보고 싶기도 하고 닮고 싶어서 따라 하기도 해. 어떤 여자 친구는 너무 좋아서 뭘 하는지 궁금하고 만날 땐 두근거리기도 하고 설레. 또 보고 싶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뽀뽀하고 싶고 같이 살고 싶고 그렇진 않아. 결혼하고 싶고 함께 아이도 낳고 싶고 그렇지도 않거든? 좋아하는 마음도 멋지다고 생각하는 마음에도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 그런데 아직 이안이 나이에는 확실하게 모를 수 있어.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멋지다고 생각한 것일 수도 있고, 난 남자를 멋지다고 느끼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좋아하는 거였다는 걸 깨달을 수도 있고, 그런데 엄마는 그건, 그 누구보다 자신이 정확하게 안다고 확신해. 엄마도 누가 ‘넌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야.’라고 말해줘서 안 게 아니라 그냥 엄마가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엄마 스스로 알았어. 분명히 너도 크면서 네가 스스로 알게 될 거야. 그런데 키포에서 처음 ‘게이’라는 말이 나오는 장면을 봤을 때 어땠어?”
“사실은 키포가 고백했을 때, 벤슨 ‘나는 게이야’라고 대답했을 때, 아, 쟤는 남자처럼 보이는 여자구나라고 생각했어. 남자인데 남자를 좋아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그런데 남자라는 걸 알았을 땐.. 뭐, 별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아. 그런데 엄마, 학교에서 어떤 애들은 ‘넌 게이야.’ 이렇게 말하면서 다른 애들을 놀리고 그래. “
“사람들은 보통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적은 수의 사람들을 놀리고 그래. 어른이 되면서 더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놀리지 않게 되기도 하지만…. 네 나이 때는 학교에서 만나는 친구들이 전부니까…”
“그런데 수가 적다는 건 희귀하다는 거 아니야? 희귀하면 되게 좋은 거잖아.”
“어머? 너 희귀하다는 말도 알아?”
응, 알아. 희귀템은 최고로 특별해.
완전 좋은 거야.
“아…. 맞다, 기억나? 네가 유치원 때 애들이 눈 작고 코 작다고 놀렸잖아. 너만 한국 사람이고 다른 애들은 모두 이탈리아 사람이니까 네가 놀림을 받았잖아. 넌 그냥 한국 사람, 그냥 너인건데 말이야. 게이도 그냥 게이, 그 사람인 거야. 사람들은 때로는 수가 더 많은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해서 수가 적으면 비정상이라고 말하곤 해. 그래서 수가 적은 사람들이 마치 잘못된 것이라고 부끄럽게 느끼게 만들기도 해. 내가 나인 것이 잘못이고 부끄럽다고 느끼게 만드는 게 진짜 잘못이고 부끄러워해야 하는 일인 줄도 모르고. 넌 어때? 이탈리아에 사는 한국사람으로 사는 게? 이탈리아에서 사는 이탈리아 사람이고 싶었던 적 있어?”
“그럴 때가 있기도 하지. 내가 이탈리아 말을 못 알아듣거나, 이탈리아 단어를 잘 모를 때. 친구들은 다 이해하는데 난 모를 때.”
“예를 들면?”
“예전에 ‘침’의 이탈리아 말을 몰라서 로렌조에게 물어봤어. ‘로렌조, 입에서 나오는 그 물을 뭐라고 해?’ 이렇게. 로렌조가 알려줘서 이제는 알지. 난 모르는데 친구들은 알고 있는 말들이 많아.”
그 순간, 옆에서 킨더조이를 먹던 이도가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고릴라다!”
킨더조이는 달걀 모양의 초콜릿인데 안에 작은 장난감이 들어있다. 매 시즌마다 장난감의 종류가 달라지는데 최근에는 동물 시리즈다. 고릴라가 마음에 들었는지 기쁘게 조립을 하고 있는 이도를 약 올리며 이안이가 말했다.
“그 고릴라 완전 너랑 닮았네~”
“이안!”
이도가 화가 나서 소릴 질렀다. 그때 며칠 전 보았던 인스타 피드가 떠올랐다.
“이도, 이럴 땐 이렇게 대답해줘. ‘와~ 나 고릴라 진짜 좋아하는데 , 내가 고릴라를 닮았다니 정말 좋아~.’ “
내 말에 이도가 활짝 웃었다. 이안이 눈을 반짝이며 덧붙였다.
“와! 엄마! 그거 내 방법인데! 친구들이 나보고 ‘Sei stupido.’ (너 바보야.)라고 말하면 내가 와~ 나 바보 진짜 좋아해~ 고마워~ 이렇게 대답하거든.”
+
우린 하루에도 몇 번씩 소수가 되기도 다수가 되기도 한다. 다수의 원 안에 서면 다수의 원 밖에서 받던 놀림을 금세 잊는다. 이안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소수자’라는 단어가 온전히 와닿는 기분이었다. 우리가 이탈리아에서 살면서 원 밖의 소수로서 겪었던 수많은 기쁘고 슬펐던 순간들을 계속 기록해나가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한 밤이었다. 앞으로 살아가는 매 순간 그 소중한 슬픔과 기쁨들이 다수의 원 안에 머무는 순간에는 원 밖을 어루만질 수 있는 마음의 에너지가 되어주길, 다수의 원 밖에 서 있는 순간에는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길 기도하며 우리 셋은 손을 잡고 함께 걸었다. 맞잡은 우리의 손 안에는 ‘적은 건 희귀한 거라고, 희귀한 건 아주 좋은 것’라는 이안이의 말이 꼭 쥐여있었다.
written by iand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