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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마 김작가 Jan 25. 2023

이탈리아 초등학교 4학년

소설을 쓰는 아이들

크리스마스 방학, 좀처럼 스스로 책을 펼치지 않는 이안이가 소파에 앉아 열심히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책인가 했는데 무언가 인쇄된 종이묶음이었다. 방학 숙제라기엔 꽤나 빡빡하게 글이 쓰여있었다.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필기체로 쓴 제목이 보였다.


1,2편이 이미 나왔었는지 이안이가 읽고 있던 것은 3편이었고 마지막 장엔 4편 예고와 함께 모든 서점에서 구입이 가능하다고 쓰여있었다. 이탈리아 초등학교에선 필기체를 사용한다. 언젠가 자신 특유를 필체를 가지는 것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필기체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좀처럼 뭘 썼는지 당최 알아먹지를 못하겠는데 이안이는 전혀 문제없이 읽어낸다. 심지어 필체만 봐도 어느 친구의 글인지 안다.

팍시와 페레즈의 소설

이안이 읽고 있던 것은 반친구 팍시와 페레즈가 함께 쓴 소설이었다. 필기체로 휘갈겨 쓴 소설을 해독하기엔 역부족이었지만 짐작하건대 크리스마스에 일어난 모험에 관한 내용인 듯했다. 다행히 알아본 부분도 있다. 아주 짧은 문장이었다. 그러나 그 문장만으로 나의 심장은 마치 두 소년의 모험을 함께하는 듯 벅차올랐다.


Ideato da Lorenzo Paximadas
Scritto da Francesco Perez

로렌조 팍시마다스가 상상하고
프란체스코 페레즈가 씀


팍시는 반에서 가장 키가 작다.  페레즈는 반에서 가장 키가 크다. 반 아이들보다 머리하나는 더 큰 페레즈는 툭하면 눈물을 흘린다. 수업 중에도 자주 울어, 저학년 땐 선생님이 페레즈를 달래느라 수업이 중단되는 일이 잦았다. 이안이의 일기 속에도 페레즈가 등장한다.


이안의 일기 중에서


눈물이 많은 큰 키의 페레즈가 키 작은 팍시의 상상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그 보더 더 낮게 자세를 낮추고 이야기를 종이에 옮기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하나하나 모아 복사하고 다시 친구들의 세상으로  꺼내어준 엄마들의 모습도 함께 그려졌다.


크리스마스 연휴가 끝났다. 새해가 되었고 개학을 했다. 개학 첫날 집에 돌아온 이안이가 이번에도 소파에 앉아 무언가를 펼쳤다. 팍시와 페레즈의 소설 4편인가 했는데 아니었다. 이번 소설의 작가는 알리체( alice의 이탈리아식 발음이다)였다. 알리체의 소설은 표지도 있고 작가의 서문과 개별 챕터들도 나눠져 있었다.

 

알리체의 소설


알리체는 작년, 이안의 반으로 전학 왔다. 초등학교 5년간 반친구들과 담임이 동일하고 좀처럼 이사를 않는 이탈리아에서 전학은 흔치 않다. 그것도 초등학교 고학년인 4학년 전학은 더더욱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알리체는 이전학교에서 적응을 어려워했다고 한다.


알리체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INTRODUZIONE
Questa è una storia d'amore che non è successa a me , forse a qualcuno sì. Ah ciao io mi chiamo Alice e sono la scrittrice di questa storia. È da molto tempo che sogno questa , storia ma non ad occhi chiusi a occhi aperti , per esempio quando non riesco a dormire penso a questo , spero che questa storia vi piaccia. Non vedo l'ora di raccontarvela.

서문
이것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예요. 제 이야기는 아니지만 누군가의 이야기일 수는 있겠지요. 아, 저는 알리체예요. 이 이야기의 작가지요. 아주 오래전부터 이 이야기를 꿈꿔 왔어요. 하지만 눈을 감지 않고 눈을 뜨고 말이죠. 이를테면 잠들지 못하는 날이면 이 이야기를 생각했어요. 여러분이 이 이야기를 좋아하면 좋겠어요. 여러분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려니 너무 기대돼요.


소설의 제목은 [Amicizia ritrovata(되찾은 우정)] 중학교 때 서로 좋아하던 주인공들이 10년 뒤 다시 만나 마법 같은 어느 날 빗 속에서 키스를 하며 이야기가 끝난다. 어릴 적 보았던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이 떠올랐다. 앤이 수업시간 눈을 뜨고 꿈을 꾸던 장면이었다. 앤이 창밖을 바라보자 순식간에 벚꽃이 흩날렸다. 그 장면이 참 좋았다. 내가 그랬기 때문이다. 항상 무언가를 상상했다. 눈앞에선 언제나 상상이 펼쳐졌다. 어린시절 나의 상상은 진지했고 선명했다.


이안이 말했다. 엄마, 노트 하나만 줘. 그리고 표지에 [이안이에 이야기 책]이라고 썼다. [말하는 똥들에 전쟁]이 작은 노트 안에 펼쳐졌다.(이안은 '에'와 '의'를 항상 헷갈린다. ) ' 똥 이야기' 좀 그만하라고 그러긴커녕, 작정하고 말하는 똥들로 세상에 똥칠을 하기 시작했다. 말하는 똥들은 수상하고 지독한 냄새를 풍긴다. 똥이야기는 질색인데 이상하게 이 똥들은 너무 궁금해 자꾸만 기다려진다.



지난 1년 반동안 이안이는 위매거진의 키즈에디터로 두 달에 한번 기사를 썼다. 한번 해보겠느냐 물었고 이안이 해보겠노라 했지만 하고 싶지 않다 했어도 해봐라 압박을 했을 테니 엄마의 바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3번의 기사를 약속하고 시작한 키즈에디터일이 연장되고 연장되어 18개월 동안 총 9개의 기사를 썼다. 2023년이 되면서 출판사의 매거진 개편과 함께 이안의 키즈에디터도 종료되었다. 소식을 알리며 이안이 별 생각이 없거나 시원해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은 아이의 반응은 의외였다.


“내 기사의 반응이 안 좋았대? 그래서 이제 못 쓰는 거야? 다음에 내 기사가 필요하면 꼭 나에게 다시 연락하라고 해주면 안 돼?”


이안이는 기사 한편당 세금을 제하고 10만 원이 안 되는 돈을 받았다. 아이가 조금 성의 없이 기사를 쓰면 말했다.


“이건 네가 돈을 받고 쓰는 거야. 그리고 사람들이 돈을 내고 잡지를 사서 네 글을 읽는 거고. 그렇다면 그만큼의 책임감을 가지고 정성을 다해서 써야 해. “


이 말을 이안이가 이해하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이안이가 자신의 기사에 애정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이안이가 자신의 글에 대해 가지는 마음의 크기를 과소평가했다.


이안의 기사들

작년 말 우리 가족에게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 우리 가족의 유튜브 로마가족 채널을 만화책으로 만들어 보자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우리 가족이 주인공이 되어 이탈리아의 일상과 문화를 보여주는 만화 시리즈를 만드는 기획이었다. 일 년의 준비 끝에 지난 12월에 1권이 세상에 나왔다. 책 속에는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이안이의 반친구들도 등장했다. 개학을 하고 이안이는 갓 나온 책을 들고 학교에 갔다. 과장되게 자랑할 이안이와 신기해할 아이들 모습이 눈이 선했다. 책에 등장한 안토니오와 루카는 이미 한국의 유명인사가 된 듯 흥분했다고 한다. 덧붙여 팍시와 페레즈가 이안이게 자신들의 소설을 제공하고 그 이야기를 만화책에 등장시키는 콜라보를 제안했다고 했다.


꿈만같은 일이 벌어졌다 #로마가족의유럽살이 시리즈라니!


“이안, 엄청나지 않아? 엄마는 우리가 유튜브를 시작할 때 많은 상상을 했지만 만화책은 생각도 못했다고!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놀랍지 않아?”


엄마, 난 상상했어.
난 항상 우리의 만화책이 세상에 나오는
상상을 했어.


그제야 깨달았다.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안이의 꿈이 이뤄진 것이었다. 이안이가 눈을 뜨고 꾸는  꿈 속에 내가 있었다.


“엄마 그런데 나는 두 개의 마음이 있어. 우리 만화책이 인기가 많아지면 좋겠다는 마음과 나만 재미있으면 된다는 욕심”

“그게 왜 욕심이야?”

“그림작가님이 너무 정성을 담아 그린 그림이 물거품이 되지 않으면 좋겠어. 우리 만화책이 인기가 없으면 이 그림들이 물거품이 되는 거 아냐? 나도 이도 정말 귀엽게 그려줬는데...."


나의 시선에선 나만 즐거운 것으로 충분하다는 마음이 더 순수해 보이고 많은 사람들이 사랑해 주면 좋겠다는 마음이 욕심 같은데, 이안의 시선에선 나로 충분한 마음이 욕심이다. 9살의 소년은 이미 책 한 권에 얼마나 많은 정성과 수고가 담겨있는지 안다. 이안이 욕심이라고 느꼈던 그 마음의 뿌리는 책임감이었을까?


띵, 마침 문자가 왔다. 이안이 반 단톡방이었다. 크리스티안의 엄마, 알레시아였다.


Ciao, questa sera ho avuto il piacere di leggere il racconto di Alice, veramente molto carino. Romantico, divertente, ben strutturato, con l'happy ending che piace sempre!!! Brava Alice!!!! Falle i complimenti da parte mia!!!!

안녕, 오늘 밤 알리체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너무 기뻤어. 너무 귀엽고 낭만적이고 흥미롭고 심지어 해피엔딩은 언제나 좋아. 알리체 너무 멋져. 정말 칭찬해.


띵, 리비아의 엄마, 로산나였다.


Bravissima Alice! Non smettere mai di sognare.

알리체 정말 최고야. 꿈꾸는 일을 절대 멈추지 마.


앞에 앉아 소설을 쓰고 있는 이안이를 불렀다.


이안, 계속 상상하고 꿈꿔.
네가 생각하는 모든 일은 다 이뤄져.
진짜야.
정말이야.


좀처럼 단톡방에 등장하지 않는 이방인 엄마인 나도 짧게 글을 남겼다.


L’ho letto anch'io.  Ho letto anche il racconto di Paxi e Perez.  Spero che tutti non smettano di sognare e scrivere.

나도 알리체의 소설을 읽었어. 그리고 팍시와 페레즈의 이야기도 읽었어. 모두가 꿈꾸고 쓰는 일을 멈추지 않기를 바라.


모두 속엔 나, 이안이 그리고 우리 모두가 담겨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새로운 소설이 또 등장했다. 이번엔 사무엘과 조반니가 공동 저자이다.


"이안, 이 소설은 어땠어?"

"조금 평범했어. 악당이 나오고 착한 애들이 나와 그리고 싸워서 이겨. 그런데 악당이 왜 악당이 되었는지도 안 나오고 어떻게 이겼는지는 자세히 안 나와. 그냥 싸우고 이겼다고."

"말하는 똥들의 전쟁 만한 이야기가 없구먼, 네가 어서 그 이야기를 완성해야 해. 완전 난리가 날걸?"


한동안 작품 활동을 게을리하던 이안이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는지 눈을 반짝였다. 아이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자신만의 풍성한 세계를 완성해 나간다.



written by iandos


https://youtube.com/@roma_family


http://m.yes24.com/Goods/Detail/116422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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