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 초급반 : 주제파악
수영을 시작한 지 세 달이 되었다.
세 달 동안, 수영수업에서 가장 크게 배운 것은 주제파악이다.
세 달 중 두 달을 배영만 했다.
한 두 달 나보다 앞선 2번 라인의 사람들과 나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이고 내가 스스로 느끼기엔 이제 배영도 꽤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슬슬 자유형을 배워도 될 것 같은데 수영선생님은 어김없이 배영 왕복 10번을 시켰다. 선생님은 자, 10번 왕복하세요, 하고서는 앉아서 휴대폰을 봤다. 거봐, 보지도 않고 뭘 알아? 제대로 보면 내가 충분히 자유형을 해도 될 수준임을 알 텐데…..
그런데 어느 날 다른 사람들이 수영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확연하게 나와의 차이가 느껴졌다. 나에 비해 자세는 다듬어져 있었고 호흡은 안정되어 있었다. 불과 몇 주 전까지 나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던 그들의 수영이 전혀 다르게 보였다. 이전엔 보이지 않던 격차가 확연하게 느껴졌다. 며칠 만에 그들의 수준이 갑자기 높아진 것이 아니라 애초에 초급의 눈에는 잘난 남의 수준은 물론이고 부족한 내 수준도 보이지 않었던 거다. 달리말하면 고수인 수영 선생님은 휴대폰을 하다 슬쩍 보기만 해도 수준이 보인다는 뜻이겠다.
수영선생님이 휴대폰을 하다 일어서 나에게 말했다. ‘팔이 아니야. 팔 엔 힘을 빼고 어깨를 돌린다고 생각해.’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아 눈은 휴대폰을 향한다. 뭐야, 10번 왕복하는 동안 저거 하나 말해주는 거야? 아.... 아..... 어.... 어....? 앞으로 나가는 힘이 전혀 다르다. 몸이 휘청거리지 않고 나의 의지에 따라 다듬어지는 기분이다.
그렇게 내 몸을 내가 컨트롤할 수 있게 된 수영 레슨 두 달 차에 자유형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평영 발차기를 배웠다.
수영도 일과 비슷하구나. 처음은 더디어도 한번 레벨업이 되면 탄력을 받아 몇 개의 레벨이 껑충껑충 나아간다. (그런데 일과 비슷하면 어느 정도 올라가면 긴 정체기도 맞이하려나..?)
자유형 왕복 8바퀴를 하고 거칠게 숨을 몰아슀다.
호흡을 제대로 못해서 기절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었는데 이번엔 좀 달랐다. 운동장을 쉼 없이 몇 바퀴를 뛰고 헐떡이는 기분이었다. 잘 뛰고 숨을 고르는 기쁜 숨가쁨이었다. 그때 선생님이 오리발을 내밀었다. ‘사이즈가 맞는지 봐. 갈 때는 배영 올 때는 자유형 왕복 10번이야.’
숨이 턱까지 차 올랐는데 아이고 또 달려야 해? 그렇게 다시 물속으로 얼굴을 넣고 나아가는데.....
응!!!!!! 어????? 어????? 어???? 이게 뭐야!!
발에 모터가 달린 줄 알았다. 몇 번의 발차기 만으로 말 그대로 미끄러지듯 몸이 나아갔다. 이전과 다른 중력이 나에게 작용하고 있었다. 드래곤볼에서 손오공이 정신과 시간의 방에서 수련을 하고 지구의 중력으로 돌아왔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1,2번 라인에선 초급반이 3,4번 라인에선 중급반이 수업을 하는데 오리발은 중급반 이상에게만 주어졌다. 난 그들이 고급기술을 쓰니까 오리발이 필요한 줄 알았다. 오리발이 이렇게 엄청난 효과를 주는 줄 꿈에도 몰랐다.
억울했다.
저들은 이미 잘하는데 심지어 오리발을 써서 더 잘 나아갈 것 아닌가. 이렇게 초급과 중급의 격차는 더욱 심해질 것 아닌가!
선생님이 물었다.
“어때? 정말 잘 나아가지? 그런데 오리발을 처음부터 사용하면 절대 수영 실력이 늘지 않아.”
문득 오리발의 효과를 이토록 강렬하게 느낀 것은 지난 3개월 동안 주야장천 제자리걸음 같은 기초연습을 한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오리발을 사용했다면 좋은지 조차 몰랐겠지. 주제파악도 못하는데 좋은 것의 가치를 파악할 수가 있겠는가? 가치를 안다 한들 활용할 줄 몰랐겠지.
그날 저녁 방과 후 아들의 과학 테스트를 앞두고 함께 공부했다. 공부 전엔 몸이 꼬이던 아이가 거듭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하나 둘 이해를 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공부하던 아이가 말했다.
엄마 공부가 재미있어
“처음 시작할 때 첫 문장부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했잖아. 첫 문장 다시 읽어 볼래? ‘식물계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식물들로 이뤄져 있다. 식물은 기본적으로 뿌리줄기잎으로 이뤄진다.’ 자, 이게 가장 첫 문장인 이유는 이 내용이 앞으로 우리가 배워나갈 내용이라는 거야. 식물에게 중요한 건 뿌리줄기잎이라고 설명하고 구 다음엔 어떤 내용이 나왔어? 잎에 대한 설명 그리고 줄기의 역할 그리고 뿌리의 역할에 대해 알려줬지? 그럼 다음엔 무슨 내용이 나올까?”
“어떤 환경에 어떤 모양의 식물이 자라는지 나오나?”
“맞아! 그다음엔 그럼 뭘 배울 것 같아?”
“나, 알 것 같아. 그럼 식물이 왜 필요한지 나오지 않을까?”
“자, 그럼 이걸 다 알게 되면 이제 네가 나뭇잎을 보면 어떤 것을 생각할까?”
“음.. 나뭇잎은 왜 녹색인지…그럼 나뭇잎에 색이 노란색이나 빨간색으로 변하는 건 무슨 의미인지..”
“아무것도 모르면 나뭇잎은 그냥 나뭇잎이지만. 알면 나뭇잎의 색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지. 그러니까 모르면 그냥 모르지만 알면 더 많은 것을 보게 돼. 엄마가 사업을 하잖아. 그런데 요즘 뭘 해야 할지 그려지지 않아. 엄마는 엄마의 상상력이 부족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왜였을까?”
“엄마가 배우지 않아서?”
“맞아. 엄마가 아는 것이 많지 않아서 상상을 못 하는 거였어. 사람은 자신이 아는 만큼 상상할 수 있거든. 그래서 엄마가 공부를 시작했어. 그런데 공부를 하고 책을 읽으니까 이전엔 안 보이던 것이 보여. 그러니까 공부가 재미있어지더라고.
더 많이 알면 더 크게 상상할 수 있어.
모르면 그냥 몰라.
알면 더 많이 알게 돼.
다음 날, 수영 수업을 5분 남기고 선생님이 오리발을 던져주었다. 어쩐 일인지 중급 한 학생들이 모두 결석이라 3번 라인이 비었다. 항상 3번 라인에서 수영을 하고 싶었다. 수영장 천장은 유리창으로 되어 있는데 오전시간이면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 물에서 찰랑거렸다. 그런데 햇살이 1번 라인까지 미치지 못했다. 오리발을 끼며 선생님에게 ‘3번 라인에서 수영하고 싶어요’라고 말하고 두 라인을 넘어 3번 라인에 섰다.
햇살이 출렁이는 물속을 가르며 나아갔다. 수영 수업 한 시간 중 마지막 20분은 대체 언제 끝나나 시계만 봤는데 오리발을 하고 있으니 물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영원히 이렇게 수영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럼 내 마음을 읽었는지 선생님이 말했다 ‘오리발 하고 집에 가고 싶지? 밖으로 나오면 엉거주춤 걸어야 해서 여간 불편하게 아니야.’
오리발도 우연히 넘어온 3번 라인도 나에게 허락된 건 단 5분이었다. 3번 라인이 나의 라인이 되는 때는 왕복 10번을 수없이 더 반복하고 오리발로 제대로 잠영을 할 수 있는 시점일 것이다. 어쩌다 운이 좋아서 부족한 실력임에도 경험할 수 있었던 3번 라인과 오리발이 허락된 달콤한 순간은 5분 만에 끝났다. 다음 수업부터 다시 1번 라인으로 복귀다. 그래도 좋다. 제자리걸음 같은 반복 끝엔 발차기 한 번에 트랙 끝까지 도달하는 세계가 기다리고 있으니.
배우지 않으면 알 수 없고, 알아야지만 내 수준이 보이고, 내 수준을 알아야 뭘 배워야 할지 알 수 있다. 그렇게 더 많이 알게 되면 더 재미있어진다. 하지만 업그레이드된 재미를 즐기려면 고난이도의 기술이 요구되겠지. 뭐, 두렵지 않다. 그땐 나에겐 오리발이 있을 테니. 게다가 제대로 써먹을 줄도 알 테니 말이다.
우쭐대지 말라.
우선 지금은 정신과 시간의 방에서 수련을 할 때다.
written by iand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