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 남매 키우기 #5
Io sono Coreano Italiano!!
(난 한국인 이탈리아인이야!)
이안이가 소리쳤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저녁 식사 전, 친구네 가족들과 간단히 식전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엄마들은 앉아서 수다가 한창이었고 아빠들은 서서 대화중이었다. 아이들은 감자칩을 먹으며 투닥투닥 장난을 치고 있었는데 무엇 때문인지 이안이가 그리 소리를 쳤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친구네 가족들은 모두 한국과 이탈리아 국제커플이었다. 우린 유일한 한국인 가족이었는데 아들의 말에 누군가 '그래, 이안이는 한국인 이탈리아인이지' 하고 응수해주었다.
솔직히 당황했다.
당연하게 아들이 자신이 한국인이라고 인지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 번도 아들과 국적에 대해 이야기해 본 적 없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무엇보다 한국어는 ‘이안이 말’ 이탈리아어는 ‘유치원 말’ 이라고 했던 아들이었기에 ‘coreano/ italiano’ 라는 단어 자체를 알고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누가 그렇게 가르쳐 주었냐 물으니 유치원 선생님이 그렇게 이야기해 주었다 했다. 아마도 유치원에서는 한국에서 이중국적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없을 테니 로마에서 태어난 아이를 이중국적자로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집에 돌아와 아이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이안이는 한국인이야 이탈리아인이야?"
이안이는 한국인 이탈리아인이야.
"그럼 아빠는?
한국인.
"그럼 엄마는?"
한국인
"그럼 이안이는?"
한국인 이탈리아인
"엄마와 아빠는 한국인이고 이안이는 한국인 이탈리아인이야?"
엄마는 이안이 하고 싶은데로 하라고 하잖아. 난 한국인 이탈리아인 할래.
난 언제나 로마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일어날 많은 일들을 상상해보곤 한다. 이 대화는 그 수 많았던 상상 속에서 단 한번도 자리한 적 없다.
실전은 상상을 초월한다.
2015년 5월 5일
로마에서 아이를 키우는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첫날이다. 이안이는 두 돌을 두 달 반 남겨두고 있었다.
그 첫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당시 4살이었던 친구의 아들이(한국인 이탈리아 혼혈) 유치원 적응을 힘들어하여 친구는 선생님과 상담을 했다. 상담을 하고 나서는 길에 선생님은 책 몇 권을 추천해 준다. 아들에게 도움이 되겠지 했던 책에서 엄마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느낀다.
토끼귀를 가지고 놀리던 다른 동물들이 자신들도 모두 하나씩 다른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다른 무언가가 왜 있는가를 묻기 시작한다. 마지막엔 그 모든 것이 각자의 역할이 있고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다름을 기쁘게 받아들이게 된다.
항상 아들에게 왜 아이들과 다른 것이냐 묻던 엄마는 아들의 그대로를 인정하기로 한다. 며칠 후 유치원 선생님이 멋진 그림이라고 반에 붙여놓은 아들의 그림을 보았을 때 너무나 특별하고 아름다워 보여 감동했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주었다.
로마에서 한국 아이로 이탈리아 아이들과 자라나게 될 이안이에게 앞으로 펼쳐질 삶은 특별해 보이지만 결코 즐거운 일로만 채워지지는 않을 것임을 안다. 남들과 다름이 개성이 되기도 하지만 고민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친구가 했던 고민은 멀지 않은 훗 날 내가 할 고민이 될 것임을 안다.
고민에 동화책을 추천해준 선생님도 멋지다. 실질적인 조언이 필요한 순간도 있지만 때로는 아이는 물론 엄마에게도 각자 생각하고 서로를 이해할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4살의 아들에게 엄마가 모든 것을 다 해줘야 한다는 부담감을 덜어내고 아이를 믿어주는 엄마가 되는 것, 가장 어렵지만 가장 쉬운 해답이기도 하다. 그 해답으로 향하는 길에 멋진 길잡이가 된 방법이 독서라는 것은 또한 얼마나 멋진가!!
혼돈과 오해,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똑같은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불행을 부른다. 그리고 오직 소설 속에서만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모든 마음이 똑같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것이 소설이 지녀야 할 유일한 교훈이었다.
이언 매큐어[속죄] 문학동네, 2003
책을 읽는다는 것은 지식을 쌓기 위함보다 그 보다 더 높은, 나를 너를 그리고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함이라는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이런 마음으로 시작된 프로젝트
nati per leggere
(읽기 위해 태어났다.)
가족 안에서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시작되는 독서를 장려하기 위해 1999년부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운동이다. 비단, 아이만의 독서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가정 내에서 습관적으로 독서가 이루어지는 풍경을 만들어 나가기 위함이다. 특히, 큰소리로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은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자극을 선사한다.
사이트에서는 추천 도서 리스트와 이탈리아와 세계 각지에서 열리는 독서 행사 정보들은 알 수 있다. 이탈리아 각 지역의 어린이 서점과 도서관 정보도 얻을 수 있다. 추천도서가 일반 서점에서 판매를 하지 않는 경우에는 사이트 내의 어린이 서점에서 구입 또는 주문이 가능하다.
사이트를 통해 어린이 서점을 검색하다 집에서 5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어린이 서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준다. 당시 이탈리아 북부의 도서관에서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시간이 있다는 글을 보고 부러웠는데 로마에서도 이런 소중한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 번씩 서점으로 향하기 시작한 것이 어느덧 2년 반이 지났다. 아들은 4살이 되었다. 생후 6개월부터 함께 할 수 있는 책 읽기 시간이 있어 이번 달부터는 둘째(9개월)도 함께 서점으로 향한다.
2년 반 전, 처음 서점에 아들과 함께 들어서던 날 구입했던 책이다.
Che cos'è un bambino?
-Beatrice Alemagna
<un bambino è unapersona piccola.
Un bambino ha piccole mani, piccoli piedi e piccole orecchie,
ma non per questo ha idee piccole.
Le idee dei bambini a volte sono grandissime,
divertono i grandi, fanno loro spalancare la bocca e dire: “Ah!”>
어린이는 무엇인가요?
-베아트리체 알레마냐
<어린이는 작은 사람 입니다.
어린이는 작은 손, 작은 발 그리고 작은 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작은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생각은 때론 엄청나게 크고,
어른들을 즐겁게 하고 입을 크게 벌려 “아!” 하고 말하게 합니다.>
아이들은 말을 잘 못하고 어른들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언어 외적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모든 감각이 엄청나게 발달한다. 예민하고 섬세하다. 말하지 않는다 하여 모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훨씬 더 많이 느끼고 있다.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태교를 하고 태어나면 1살이 될 만큼 아이들의 존재를 크게 인정하면서 오히려 태어나고 나면 아이가 어리기 때문에 알지 못한다고 치부해 버리는 실수를 한다. 너무나 자주 아이를 어린아이가 아니라 작은 사람으로 대해야 함을 잊는다.
이탈리아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살아오고 있지만 아이를 키우며 만나는 이탈리아의 삶은 매일매일이 새롭고 때로는 겁이 난다. 잘 해 나갈 수 있을까...
걱정은 조금 내려놓자.
혼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작은 사람들, 이안과 이도가 함께 걸어가는 길이기에….
written by_iandos
*해당 글에 들어간 모든 사진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이 글은 개인 블로그를 통해 연재되었던 글을 재구성하였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