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은 누구에게든, 어떤 식으로든 의미가 있는 날일 것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날이다 보니 흘러가는 세월에 아쉬움이 더해지는 날일 수도 있고, 하룻밤만 지나면 한 살 더 먹는 것이 마냥 기대되는 날일 수도 있다. 한 해가 가고 새해가 밝는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의미를 지니게 되니까. 내게도 12월 31일은 특별한 날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1984년 12월 31일, 엄마는 예정일을 3주 이상 남긴 첫 딸의 진통을 느꼈다. 임신 후기에 들어서면서 임신중독에 걸렸던 것이 급기야 조기 진통을 일으킨 것이었다. 임신 기간 내내 지독한 입덧에 시달리느라, 볼록 나온 배를 제외하고는 어디도 임산부 같지 않았던 깡마른 몸으로 엄마는 분만대기실의 차가운 침상에 누웠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던 진통 시간을 의료진들은 엄마의 엄살로 치부하며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했다.
하필 12월 31일, 다음날부터 이어지는 신정 연휴라 의료진들 중 상당수가 휴가를 떠났던 것인지 엄마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의료진은 없었다. 엄마는 도저히 자리에 누워서는 견딜 수 없는 진통으로 기다시피 해서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침대의 철제 다리를 붙잡고 쪼그리고 앉아 있으면 아주 조금은 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본 간호사들은 우악스러운 손길로 엄마를 들어 침대에 다시 눕혔고, 그때의 고통을 엄마는 ‘패대기 치는 것 같았다’라고 기억했다. 그만큼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넘기고, 죽기 직전의 진통 끝에 내가 태어났다. 그리고 분만실에서 나온 엄마의 온몸에는 검붉은 멍자국이 가득했다.
내가 출산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엄마의 출산기를 몇 번이나 들었어도, 피부로 와 닿지 않았다. 그게 어느 정도의 고통이었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열 달 동안 거의 먹지 못해 임신 전과 만삭 때의 몸무게가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해도, 진통이 괴로워 온몸에 멍이 드는 것조차 몰랐다고 해도 그 고통의 강도를 알 수 없었다.
첫 아이 때 20주를 꽉 채워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토덧’을 했고, 덕분에 저혈당으로 쓰러져 난생처음으로 구급차 신세까지 지고서야 입덧의 고통을 알았다. 진통 24시간 만에 분만을 했을 때, 사지가 뒤틀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았다. 엄마는 입덧과 진통에 괴로워하는 내 곁을 지키며, 그런 것까지 엄마를 닮았다며 도리어 내게 미안해하셨다. 나는 엄마의 고통을 그제라도 이해할 수 있었어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튼 열 달을 품어준 엄마에게 그만큼이나 큰 고통을 주고, 1984년의 해가 저물기 직전에 나는 세상의 빛을 보았다.
어렸을 때는 내 생일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12월 31일은 겨울 방학이 시작되고 일주일쯤 지난 시기라 친구들에게서 생일 선물을 받을 수가 없었다. 보통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연말 중의 연말이라, 친구들을 불러 모아 생일 파티를 하기에도 애매한 날이었다. 더군다나 어른들은 꼭 크리스마스 선물과 생일 선물을 ‘겸해서’ 주셨다. 동생만 해도 생일 선물과 크리스마스 선물을 따로 받는데 나는 두 개를 하나에 얹어주는 게 어린 나이에 왜 그리 서운했던지. 지금 생각하면 참 아이다운 마음이었다.
그때의 나는 내 생일이 그렇게도 섭섭했다.
스무 살이 되어 대학에 입학하자, 내 생일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요즘은 그런 제도가 없어졌지만 그때만 해도 ‘빠른 연생’ 친구들이 있었다. 1월과 2월에 태어난 친구들은 한 해 일찍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대학 동기들 중에도 85년생 친구들이 몇 있었는데, 대학 근처 술집에서 신분증 검사를 하는 날이면 학생증을 소지한 대학생임에도 그 친구들은 술집에서 쫓겨나야 했다. 친구들 몇만 돌려보낼 수 없어서 떼로 몰려다니며 신분증 검사를 하지 않는 곳을 찾아다녀야 했다.
그럴 때마다 친구들은 내 생일을 치켜세웠다. 술을 곧잘 마셨던 내게 “너는 아무래도 술집에서 안 쫓겨나려고 기를 쓰고 12월 31일에 태어났을 것”이라며 농담을 던져댔다. 철없던 스무 살의 나는 그 말을 받아 “그래서 내가 엄마 뱃속에서 3주나 일찍 나온 것”이라며 응대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대화다.
어찌 되었든 그쯤부터 나는 내 생일을 조금 좋아하게 된 것 같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내 생일이 점점 더 좋아졌다. 지인들은 내 생일 축하 멘트 뒤에 꼭 한 해의 안부를 물었고, 새해의 복을 빌어주었다. 송년회에는 언제나 내 생일 케이크가 준비되었고, 내 생일 파티로 시작한 모임은 이내 송년회가 되었다. 그렇게 내 생일은 언제나 나에게서 시작해서 모두의 축제로 끝이 났다. 12월 31일은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날이었다. 그 중심에 내가 있다는 것이 말할 수 없이 감사하고 행복했다.
생일날에 그 해 일 년을 되돌아볼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매년 12월 31일이면 생일 케이크 위에 꽂힌 나이만큼의 초를 미련 없이 '후-'하고 불며, 지난 일 년을 날려 보냈다. 해마다 아쉽고 힘들었던 일은 있었지만 그런 일들은 '후-' 입김에 촛불이 꺼지는 순간, 매캐한 냄새와 함께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탁' 전등의 불이 켜지는 순간, 새로운 한 해에 대한 기대와 설렘도 함께 켜졌다.
생일을 보내고 정말로 한 해가 끝나는 마지막 밤이 오면 가만히 누워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며 그 해의 장면들을 떠올렸다. 좋았던 일, 행복했던 순간, 괴로웠던 일, 힘겨웠던 순간까지. 지나간 시간들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살아있는 장면이 되어 어두운 천장에 선명히 떠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들을 잘 지나 한 해의 마지막 날이자 내가 태어난 날에 무사히 도착했음이 감사했다.
그렇게 나는 내 생일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2년 전, 오갈 데 없던 엄마와 나, 동생까지 우리 세 모녀를 품어주셨던 외할아버지가 하늘로 가셨다. 그것도 내 생일이었던 12월 31일에. 할아버지는 심정지가 오기 전, 곁을 지키고 있던 엄마에게 “오늘이 진아 생일이제?”라고 물으셨다고 했다. 오늘은 정신이 좀 맑으신 것 같다며, 내 생일을 물으시더라는 엄마의 전화를 받은 지 불과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거짓말 같은 부고를 받았다. 엄마는 싸늘하게 식어가는 할아버지 곁에서 소리 내어 우셨고, 나는 먼 곳에서 숨죽여 울었다. 그 해 생일은 아마 내가 태어났던 1984년 12월 31일 이후로 제일 많이 울었던 생일날이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서른다섯이 된 손녀의 생일을, 서른다섯 번 모두 축하해주시고는 가볍게 훌훌 날아가셨다. 슬픔과 감사함이 뒤섞였던 그 날의 울음은 할아버지가 내게 남긴 마지막 선물 같았다. 마지막 가시던 길에도 내 생일을 기억해주셨던 할아버지의 마음이 오랫동안 나를 지켜줄 것 같았다.
그렇게 12월 31일은 내게 또 하나의 의미 있는 날로 남았다.
올해도 어김없이 시간은 흘러 12월 31일이 되었고, 나는 서른일곱 번째 생일을 맞았다. 누구에게도 쉽지 않았던 2020년이 이렇게 저물어간다. 더불어 나의 서른일곱도 안녕을 고할 때가 왔다.
힘든 한 해였지만 개인적으로는 많은 것을 얻은 소중한 한 해였다. 읽기의 기쁨을 깨달았고, 쓰기의 삶에 발을 디뎠다. 가장 어려웠던 순간에 밝고 선명한 빛을 찾았다. 덕분에 올해 생일은 후회가 적다. 스스로를 격려해주고 싶고, 껴안아주고 싶다.
하룻밤만 지나면 이별하게 될 올해의 내가 유난히도 애틋한 오늘,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해본다.
"2020년, 서른일곱을 잘 살아내어 줘서 고마워. 밝아오는 2021년, 서른여덟은 조금 더 깊고 넓은 내가 되기를."
* 지난 4월부터 브런치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육아의 일상과 부끄러운 수준의 자작시, 독서노트를 올리는 게 전부인 제 브런치에 많은 분들이 찾아와 주시고 구독까지 눌러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 글을 보실 분들도 2020년 마무리 잘하시고, 의미 있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