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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Apr 06. 2021

『정서적 흙수저와 정서적 금수저』 (최성애, 조벽)

수저론이 유행한 지 벌써 꽤 되었다. 한동안은 금수저, 흙수저와 같은 단어들이 신문 기사의 헤드라인에서도 종종 보였는데, 이제는 유행에서 약간 비켜났는지 그리 눈에 띄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수저론으로 경제적 위치를 표현하는 것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만큼 수저론이 우리 인식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수저론의 강력한, 아니 유일한 기준은 바로 ‘경제력’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경제력이 아니라, ‘부모의 경제력’이라는 사실이다. 개인의 노력으로는 결코 바꿀 수 없는 ‘부모’로부터 이미 결정되는 것, 수저론이 유행한 이후로 사람들은 자주 무기력해졌다.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이미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들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은, 어떠한 노력도 부정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심리 상담 센터를 운영하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음에도 불행한 사람들의 삶에 집중했다. 누가 봐도 ‘흙수저’인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면서 ‘사람의 미래를 좌우하는 수저가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 었다.(12쪽) 바로 부모와 자녀 간의 ‘애착 관계’였다.           



저희는 사람의 미래를 좌우하는 ‘수저’가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금수저로 태어났지만 자신이 불만스럽고 세상이 불편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에 고마운 일은 없고, 잘못은 남 탓이라 여기고, 만사가 짜증스럽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지만 정서적으로 빈곤합니다.
이들은 흔히 부모의 소유물처럼 살아왔거나, 무엇인가 잘해야만 인정을 받는 조건부 사랑을 받았거나, 돈으로 외부인의 손에 맡겨져 자란 사람들입니다. 보무와의 정서적 유대감 결핍으로 인한 ‘애착 손상’이라는 발달 트라우마 후유증을 앓는 사람들입니다. …… 그래서 저희는 이들을 정서적 흙수저라고 부릅니다.

이와 반대로 경제적으로 흙수저로 태어났지만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외적 자극에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과 ‘할 수 있다’는 긍정적 인생 대본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로 화목한 가정에서 부모와의 안정된 애착 연결 속에서 정서적 양육을 풍요롭게 받은 사람들입니다.
통장이 두둑하면 여유가 생기듯이 정서적 통장이 가득 채워져 있는 사람은 느긋합니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현재 사정이 어렵더라도 희망찬 금빛 비전을 선택할 줄 아는 ‘정서적 금수저’입니다.(12쪽~13쪽, 프롤로그)     


두 저자가 주의 깊게 본 것은 ‘애착 손상’이라는 개념이었다. 이제는 애착 손상이 단순히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로 확대되었음을 꼬집고 있었다. 애착 손상을 입은 사람들이 늘어갈수록, 사회의 안전망은 유지되기 어렵다. 정서적 흙수저로 자란 아이들은 스스로 불행한 것을 넘어, 다른 아이의 삶도 불행하게 만든다. ‘폭력적이거나 반사회적인 행위를 아이가 학교에서 하면 문제아이고, 군인이 군에서 하면 관심병사이고, 성인이 사회에서 하면 범죄자이고, 권력자가 자신의 위치에서 하면 갑질(16쪽)’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애착의 핵심은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달려와주고 내 편이 되어줄 거라는 믿음과 기대‘입니다. …… 아이가 최소한 만 2세가 될 때까지는 양육자가 옆에서 지켜주며 양육과 보호를 하는 것이 길게 보면 아이에게 ‘기본 신뢰감’이라는 엄청난 이득을 줍니다.

기본 신뢰감이 있으면 세상이 안전하게 느껴져서 학교 적응도 쉽고, 선생님과도 잘 지내며,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탐색의 욕구가 있어서 변화에 대한 적응력과 유연성이 높아집니다. 또한 기본 신뢰감이 있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에서 상처 받거나 두렵거나 난관에 처했을 때 다시 돌아갈 안전한 피신처가 아이의 내적 작동 모델로 자리 잡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본 신뢰감은 정서적 금수저들을 더욱 긍정적이고 풍요로운 경험으로 이끌어주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105~106쪽)          



앞선 여러 글에서도 썼지만 나는 전형적인 흙수저였다. 아빠는 나와 세 살 터울인 동생이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 가족의 곁을 완전히 떠났고, 끝내 엄마는 아빠와 이혼했다. 지금은 한부모가정이라는 표현으로 순화되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결손가정’이었다. ‘결손가정’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이혼가정의 자녀들을 어딘가 ‘모자란’ 사람들로 규정지었다. 엄마는 그 때문에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던 아빠와 이혼조차 하지 못했을 만큼 편견의 벽은 높았다. (사실 한부모가정이라는 표현에도 여전히 ‘결핍’의 이미지가 너무도 강하다. 한부모가정에 대응하는 ‘두부모가정’이라는 용어가 정착되기 전까지는 아마도 그럴 것이다.)

    

특별한 기술도, 전문적인 직업도 없었던 엄마가 혼자 힘으로 두 딸을 키우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는 생활보호대상자(지금은 기초생활수급자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되어서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살았다. 단칸방에서 살던 우리 세 모녀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쯤 외가에서 살게 되었다. 엄마는 주말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한 채 20년 가까운 세월을 백화점 판매사원으로 일을 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전형적인 ‘흙수저’, 내 경제적 기반은 그랬다. 하지만 나는 애착에 손상을 입지 않고 자랐다. 오히려 아빠의 자리를 대신해주는 외가 어른들의 헌신과 사랑 덕분에 세상에 대한 ‘기본 신뢰감’을 두텁게 다진 채 살아왔다. 이제껏 몰랐지만, 나는 ‘금수저’였다. 적어도 정서적인 부분에서는 말이다.      





감사하게도 아이를 키우는 동안 휴직이 허락되는 직업을 가졌다. 덕분에 두 아이의 영아기를 온전히 함께 보내고 있다. 사실 지금의 나도, 경제적인 부분만 놓고 보자면 ‘금수저’ 근처에도 못 간다. 그러나 내가 그랬듯, 나의 두 아이도 정서적 금수저로 키우고 싶은 욕심만은 버릴 수가 없다. 그래서 통장 잔고가 바닥을 쳐도(아니, 이미 마이너스 통장을 쓸 만큼 썼구나...) 복직을 미룬 채 두 아이 곁을 지키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상황과 별개로 읽는 내내 마음이 복잡했다. 아니 불편했다. 당장 내 곁에만 해도 아이를 키우기 위해 멀쩡히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친구들이 수도 없고, 직장을 그만둘 수는 없어 돌이 채 지나지 않은 아이를 기관에 맡기고는 종종거리는 친구들 또한 셀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이 때문에 꿈을 포기한 친구나, 꿈 혹은 생활 때문에 아이와의 시간을 포기한 친구나 모두 일종의 불안과 죄책감을 안고 살았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아이 양육의 문제는 시스템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결코 해결의 여지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도 나름의 방법을 제안하고 있었다. ‘애착 손상’을 공동체의 문제로 인식하고, 앞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갈 길을 책의 마지막 장에 담아둔 것이다. ‘노동 시간이 아닌 가족 시간을 확보하자’, ‘애착의 질을 우선시하는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자’, ‘기업과 학교도 함께 나서야 한다’는 등. 대부분 외국의 선진 사례들을 제시하며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안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례들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어딘지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느낌을 받았다.  



    

이를 양육 중인 부모들에게 분명히 큰 울림이 있을 만한 책이다. 수많은 상담 사례를 통해서 진정한 ‘금수저’의 삶이란 어떤 삶인지 생각해볼 수 있었다. 또 내 아이를 ‘정서적 금수저’로 키워낼 수 있는 약간의 해법도 얻을 수 있었다. 다만 자신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여러 여건에 가로막힌 부모들에게는 읽는 내내 불편한 마음을 견뎌야 하는 책일지도 모른다. (물론 책에서 말하고자 한 것이, 부모들의 죄책감을 건드리고자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책은 여러 사회 문제의 원인을 '애착 손상'에서 찾았고, 그러다 보니 양육자의 상황과 태도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들보다 정책 입안자들이 이 책을 좀 더 진지하게 읽었으면 좋겠다. 이 시대의 수많은 문제(어린이집 학대 사건, 아동 학대, 학교 폭력, 사이코패스, 묻지마 폭력, 잔혹 범죄 등)가 대체로 ‘가정’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제 어느 누구라도 공감하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해결은 결국 ‘가정’에서 시작해야 한다. 부모가 무조건 헌신하고 잘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부모가 생업을 포기하지 않고도 아이들을 애착 관계 속에서 지켜내고 키워낼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이 절실하다.      


출산 장려금 준다고, 아이를 낳지 않을 사람들이 아이를 낳지는 않는다. 돈 얼마에 자신의 인생과 아이의 인생을 송두리째 걸 사람은 이제 별로 없다. 이 비극 속에서도 아이를 낳는 부모들은, 희생과 헌신을 각오하고도 키울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돈 얼마의 대책이 아닌, 보다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책 한 권 읽고, 너무 멀리 왔나...)


이 책은 문장 발췌보다 차례를 올리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관심을 가지실 분들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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