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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May 30. 2022

결국엔, 사랑일까요.

봄 향기를 머금고 바다를 건너온 편지에, 여름의 열기를 담뿍 담아 답장을 쓰게 되었습니다. 너무 늦지 않은 답장이기를 바라며, 단정한 마음으로 글과 마주 앉습니다.      


5월 5일 남자아이들의 어린이날 코이노보리, 3월 3일 여자아이들의 어린이날 히나마츠리. 일본에는 그런 문화가 있군요. 무언가를 구분 짓는 일이 자꾸만 불편해지는 제게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화입니다. 성별이 다른 두 아이를 키우며, 성별로 두 아이의 정체성을 구분하지는 말자고 다짐한 터라 더욱 그러하네요. 어쩐지 작가님이 사는 세상이 (비행기로 한 시간이면 닿을 거리임에도) 아득히 먼 미지의 세계처럼 느껴집니다. 읽는 내내 낯선 문화를 내 것으로 끌어안으려는 작가님의 마음결이 느껴져 괜히 코끝이 시큰했습니다. 딸아이에게 전하는 말도 뭉클했지만, 제게는 낯선 세계에서 내 세계를 지키려 고군분투하는 작가님이 더 애틋하게 느껴졌어요.




저는 대한민국의 부산에서 태어났고, 대구에서 십 년째 살고 있습니다. 해외여행이라고 해 봐야 (신혼여행을 포함해서) 세 번이 다였고, 비행기를 타야 갈 수 있는 제주도도 대여섯 번쯤 가본 게 전부입니다. 그런 제게 해외에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고 사는 작가님의 일상은 그야말로 ‘낯섦’ 그 자체입니다.  

   

저는 뿌리 의식이 무척 강한 사람입니다. 혈연, 지연, 학연, 그런 것에 마음을 두는 건 어딘지 촌스럽고 시대착오적인 것 같다고 여기면서도 피로 연결된 내 가족이 더없이 애틋하고, 동향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같은 학교를 졸업한 선후배라면 더할 나위 없이 친근하게 느껴져요. 고향(부산)에서 KTX로 겨우 45분 거리에 있는 이곳(대구)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고도, 한동안은 외로움에 몸서리를 쳤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작가님과 삶을 나눌수록 궁금해집니다. 누군가의 시선에는 밀라노의 카페에서 카푸치노를 마시는 선량작가님의 삶이, 도쿄 시부야의 거리를 활보하는 읽는인간 작가님의 삶이 마냥 낭만적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제 시선에는 그 뒤가 보여요. 그림자가 보이고 어둠이 보입니다. 리를 떠나 사는 삶은 어떠하신지. 무엇에 의지해서 살아가시는지. 가끔 아니 종종 염려합니다.


읽는인간 작가님은 그곳에서 새로 뿌리를 내리셨다지만, 여전히 가끔 이방인처럼 느껴지시지 않나요? 선량 작가님은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는 삶이 때론 떠도는 삶처럼 느껴지시지 않나요? 그럴 때면 두 분의 마음은 어떠한가요? 


뿌리에 의지해서 하루를 버티는 저로서는 두 분의 삶이 경이롭기만 합니다. 가족들(친청 식구들)과 '나' 사이에 놓인 물리적 거리를, 살아온 시간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시간을, 익숙하던 공간이 아닌 익숙해져야 하는 공간을, 눈빛은커녕 말로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을 담담히 맞이하고 받아들이시는 삶이요.




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작가님들의 삶이, 어떻게 그토록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걸까. 생각하다 문득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이 떠올랐습니다. '자기 앞의 생'을 떠올리면 함께 떠오르는 문장이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


하밀 할아버지에게 던지는 모모의 질문입니다. 부모도 형제도 없던 '모모'가 살아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랑' 덕분이었습니다. 모모는 자신을 돌보아주었던 '로자 아줌마'를 사랑했고, 자신을 데리러 오지 않는 엄마를 사랑했으며, 자신이 만들어낸 아르튀르(우산)를 사랑했습니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믿었기에 사랑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사랑했습니다. 뿌리 잃은 모모의 생은 끝내 사랑으로 뿌리를 내렸고, 가지를 틔웠습니다.


그렇다면 작가님들을 살게 하는 것 또한 '사랑'일까요. 그렇다면 무엇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곳에서도 흔들림 없이, 아니 흔들릴지언정 쓰러지지는 않으며 매일을 살아가시나요.  


오늘의 편지에는 질문이 무성하네요. 아마도 작가님들을 향한 마음이 제 안에 뿌리를 내려 질문이라는 꽃으로 피어나나 봅니다. 누군가의 삶이 궁금해지는 것은 명백한 '사랑의 증거'란 거, 아시지요?


"하밀 할아버지, 하밀 할아버지!"

내가 이렇게 할아버지를 부른 것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직 있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그런 이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위해서였다.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178쪽)


읽는인간 작가님, 선량 작가님.

두 분을 부르는 말로 편지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혹 이곳과는 먼 그곳에서 가끔 외로우시거나 휘청이실 때면, 두 분의 진짜 이름을 아는 누군가가 이곳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누군가가 두 분을 진심으로 존경하며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요. 그곳과는 시간마저 달리 흘러가는 이곳에, 글쓰기라는 뿌리로 이어진 제가 있다는 것을요.




선량, 읽는인간, 진아.

기존의 '글쓰기를 글쓰기' 매거진이 출간 계약을 하게 되어 글쓰기에 대한 글은 멈춥니다. 대신 저희 세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와 그 속에서 생긴 상념들을 편지로 주고받습니다. 앞으로도 글쓰기를 글쓰기  매거진에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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