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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Jun 02. 2022

당연하지 않은 마음

밀라노에서 보내는 편지

이처럼 찐한 러브레터를 받은 직후엔 도대체 어떤 답장을 써야 할까요?

이렇게 고민하며 글을 쓰는 것이 실로 오랜만이에요. 진아 작가님의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어떤 답을 드려야 할지 헤아렸답니다.


제 성격이 얼마나 급한지 잘 아실 거예요. 써야 할 글이 있다면 애열도 하지 않은 채 바로 시동을 걸지요. 하지만 이번 글은 그렇지 못했어요. 문장을 썼다 지웠다, 다시 썼다 지웠다 하며 한참 뜸을 들였습니다. 뭉근~ 하게 뜸을 들이며 쓰는 것도 나쁘지 않군요. 덕분에 작가님의 문장을 곱씹으며 좀 더 마음에 담을 수 있었어요.


이런 찐한 러브레터를 받아본 기억이 별로 없네요.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제 생일날 아이들로부터 생일 축하 겸 러브레터를 받긴 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당연한 주어와 동사의 나열에 큰 감흥이 없었지요. 생일이면 받는 당연한 문장들 있잖아요.

“생일 축하드려요.” “엄마 사랑해요.”

이게 여섯 살 아이의 편지였다면 큰 감동이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제 아이들은 이미 10대랍니다. 10대 아이들의 너무 당연한 문장에 건성으로 휘리릭 훑어보고 편지 봉투 안에 넣어둔 아이들의 선물 (5유로 지폐)만 꺼내어 챙겼답니다.

너무 속물 엄마일까요….

그런데 아이들에겐 그게 당연한 것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책장에 굴러다니는 편지를 보고는 어찌나 서운해하던지요. 그래서 다시 그걸 보물처럼 챙겨서 구석에 있는 짐 가방에 소중하게 넣어두었답니다.



진아 작가님께서 뿌리가 없는 삶은 도대체 어떤 삶인지 물으셨지요.

뿌리가 없는 삶이란 바로 소중한 것들을 짐가방에 보관하는 삶입니다.

그 짐가방엔 살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 생존과 상관없이 필요한 것들,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있으면 좋은 것들로 넘쳐납니다.

얼마 전에 숙소를 옮기면서 생존과도 상관없고, 삶의 질과도 상관없는 것들을 많이 버렸는데요, 여전히 짐가방은 줄어들지 않네요. 그중엔 아이들의 편지 같은…. 뭐라 단정할 수 없는 것들도 꽤 많았답니다. 마음 같아선 모두 버리고 진정한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며 살고 싶었지만, 원체 버리길 싫어하는 홍 씨 트리오 때문에 꽁꽁 싸매어 이고 지고 새로운 숙소로 왔답니다.

이런 삶을 선택한 것은 바로 저입니다. 선택은 했으나 그 결과까지는 미쳐 예상치 못했어요. 한순간의 선택이 저를 이리도 멀리 오게 만들었네요.

네, 그건 분명 사랑이었어요.

사랑이 없었다면 가족과 친구들을 떠나 이렇게 먼 곳으로  오지 못했겠지요.


진아 작가님께서 뿌리가 깊은 삶을 사랑한다 하셨지요. 고백하자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카톡에는 저희 네 자매 단톡방, 저희 다섯 남매와 배우자들이 포함된 단톡방, 막내 고모와 친정 엄마가 포함된 단톡방, 고모들과 저희 네 자매가 포함됨 단톡방이 있어요. 그러니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엮어진 단톡방이 무려 4개나 있답니다.

제 몸은 뿌리가 없는 사람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지만, 제 마음은 단단하게 뿌리를 내려 사랑이라는 양분을 향해 잔뿌리를 뻗칩니다. 이내 가지를 풍성하게 드리우고 푸르른 이파리를 흔들며 더 많은 이들의 사랑을 향해 꽃을 피우고 싶어요.

언젠간 더 멀리 씨를 흩뿌리고,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사랑해서 선택한 삶이지만, 선택에 따른 인과관계를 위해서는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지요. 그건 장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한국에 살아도 선택의 순간은 수없이 많고, 그에 따른 인정이나 후회도 여전하지요. 사람 사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라도 다 똑같은 거 아닐까요.


제가 사는 이곳을 사랑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단지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 하루를 충만하게 살아낼 뿐입니다. 그게 사랑의 한 부분처럼 보인다면, 저는 만족합니다.



저는 당연하지 않은 것들을 좋아합니다.

예를 들면, 가족 사이에 존재하는 당연한 의무들이 있지요.

저는 가족이 아닌 사람과의 당연하지 않은 의무감이 좋아요.

돈을 받은 만큼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 있지요.

저는 당연하지 않은 비금전적 관계가 좋아요. 그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내와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사랑과 당연하지 않은 관계는 "동의 유의어"인가 봅니다.



저는 요즘 마감이 있는 삶을 살고 있어요. 시키지도 않은 일을 벌이고 벌려, 날마다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일상을 살지요. 그래서 무엇을 써야 할지 매일 고민을 합니다. 어찌 보면  참 행복한 고민인 것 같아요. 몇 년 전의 제가 그토록 원했던 삶이거든요.

“마감이 있는 삶”이라니!!! 어쩜 이렇게 은유가 가득할까요?


저는 이런 은유와 해학이 있는 일상, 그런 글을 쓰고 싶습니다. 그 길에  작가님들이 계셔서 참 감사해요.


읽는 인간 작가님은 어떤 글을 쓰고 싶으신가요?

작가님의 문장을 대할 때 제가 떠올린 이미지가 과연 작가님이 처음부터 의도한 것이었을지, 궁금합니다.

왜냐하면 작가님은 저와는 다르게 글의 처음과 중간과 끝을 미리 계획하고,

문장과 문장의 순서까지도 생각하는 분이시니까요.



제 편지의 발신인과 수신인이 다르지만,

일단 보내겠습니다.

누구로부터 답장을 받을지 기대하면서요.

 


밀라노에 사는 선량,

도쿄에 사는 읽는인간 작가님,

대구에 사는 진아 작가님과 함께 쓰는 서간문입니다.

서로에게 향하는 편지지만, 엄마, 아내, 여자, 작가로서의 공감과 위로를 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편지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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