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한복판을 관통하고 있다면.

오래 만진 슬픔(이문재)

by 진아

[시 쓰는 여름] 두 번째 시


<오래 만진 슬픔(이문재)>

이 슬픔은 오래 만졌다

지갑처럼 가슴에 지니고 다녀 따뜻하기까지 하다

제자리에 다 들어가 있다

이 불행 또한 오래되었다

반지처럼 손가락에 끼고 있어

어떤 때에는 표정이 있는 듯하다

반짝일 때도 있다


손때가 묻으면

낯선 것들 불편한 것들도

남의 것들 멀리 있는 것들도 다 내 것

문밖에 벗어 놓은 구두가 내 것이듯


갑자기 찾아온

이 고통도 오래 매만져야겠다

주머니에 넣고 손에 익을 때까지

각진 모서리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리하여 마음 안에 한자리 차지할 때까지

이 괴로움 오래 다듬어야겠다


그렇지 아니한가

우리를 힘들게 한 것들이

우리의 힘을 빠지게 한 것들이

어느덧 우리의 힘이 되지 않았는가


출처: 이문재 시집 '혼자의 넓이'



‘문 밖에 내어놓은 구두가 내 것이듯’이라는 시행의 여운이 큽니다. 문밖에 내어놓았다고 해서 내 구두가 남의 구두가 되지는 않습니다.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문을 열어야 하고, 내어놓았던 '내 구두'를 신어야만 합니다.


많은 이가 슬픔이 찾아오면 외면하기를 선택하지요. 애써 모른 척합니다. 슬픔을 기쁨으로 덮으려 하고, 고통을 순간의 쾌락으로 상쇄하려 합니다. 슬픔에 무너져 내리는 이에게 “자꾸 좋은 생각을 해 봐. 슬픈 생각 대신 다른 생각을 해.”라고 조언하고, 갑자기 찾아온 고통에 몸부림치는 이에게 “다 지나가니까 힘내.”라고 충고합니다. 시를 읽다 보면 그게 얼마나 의미없는 조언이고 충고인지 깨달을 수 있어요.

슬픔이 온전히 내 것이 되어, 고통이 온전히 내 몫이 되어 만져지고 다듬어졌을 때, 비로소 나는 성장하고 성숙합니다. 그렇게 내면의 힘이 자라납니다.

슬픔의 한복판을 관통하고 있는 이에게 “힘 내.”, “잘 될 거야,”라는 진부한 조언 대신에 예쁜 엽서에 이 시를 곱게 필사해서 내밀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지금 겪는 슬픔을 잘 품고 소중히 만져, 슬픔의 각진 모서리가 매끄럽게 깎여나갈 때쯤이면 지금의 너보다 더 강하고 단단한 네가 되어 있을 거라는 마음을 담아서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