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이면, 그리움 한 단.

여름비 한 단(고영민)

by 진아

[시 쓰는 여름] 열한 번째 시


여름비 한 단(고영민)


마루에 앉아 여름비를 본다


발밑이 하얀

뿌리 끝이 하얀

대파 같은 여름비


빗속에 들어

초록의 빗줄기를 씻어 묶는다


대파 한 단

열무 한 단

부추, 시금치 한 단 같은

그리움 한 단


그저 어림잡아 묶어놓은

내 손 한묶음의

크기


출처:<봄의 정치>


장마의 시작입니다. 비 오는 날이 길게 이어지겠지요. 하루의 대부분을 실내에서 보내는데도 불구하고, 몸과 마음은 날씨 앞에 속수무책입니다. 오늘처럼 종일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이면, 괜히 몸이 무거워지고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긴 장마가 반갑지만은 않은 이유입니다.


'여름비 한 단(고영민)'은 비 오는 날을 배경으로 한 시입니다. '빗속에 들어/초록의 빗줄기를 씻어 묶는다'는 표현이 참신합니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씻어 묶으면, '그리움 한 단'이 된다고 해요. '손 한 묶음의/크기'쯤 되는 그리움이요.


비와 그리움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요. 수많은 대중가요의 가사에서도 '비'와 '그리움'이 세트처럼 엮여있는 걸 보면, 둘 사이에는 확실히 긴밀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요.


'그리움'을 사전에서 찾아본 적이 있습니다. '보고 싶어서 애타는 마음'이라고 정의되어 있었어요. 제가 느낀 그리움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습니다. 저에게 그리움은 당장 보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하며 애타는 마음이라기보다,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에 대한 애잔한 마음에 더 가깝습니다. 사전적 정의보다는 조금 더 잔잔하고 고요한 마음에 가까워요.




오늘 저녁 두 아이와 저녁밥을 먹는데, 첫째 아이가 뜬금없이 물었습니다.


"엄마, 엄마 할아버지는 하늘나라 가셨지?"

"응? 어, 맞아. 엄마 할아버지는 하늘나라 가셨지."

"언제 가셨어?"

"봄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그러니까 5년 전쯤."

"그때 엄마 슬펐어?"

"응, 슬펐지. 하늘나라에 간다는 건,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는 말이니까. 이제 엄마는 할아버지가 아무리 보고 싶어도 만날 수 없으니까."

"엄마, 나 눈물이 날 것 같아. 울어도 돼?"

"울어도 되지. 슬픈 마음이 들 때는 울어도 돼."

"엄마는 할아버지가 그리워?"

"응, 그립지. 생각하면 보고 싶고 그래. 하지만 엄마 마음속에 할아버지의 사랑이 남아 있기 때문에 괜찮아."


아이는 아무런 맥락도 없이 '그리움'을 묻더니, 저를 대신해 눈물을 찔끔 흘렸습니다.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구체적으로 경험한 적 없는 일곱 살 아이마저도, 비 오는 날이면 그리움을 느끼는 걸까요. 그게 아니라면,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가 여름비를 타고 잔잔히 흐르던 엄마의 그리움을 발견한 걸까요.


비가 옵니다. 이번 주 내내 비가 온다고 해요. 한동안은 지나간 많은 사람들을, 시간들을, 공간들을 그리워하는 데에 마음을 쏟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 어느새 장마가 끝나고 다시 햇살 가득한 날들이 이어지면, 애잔한 그리움은 묻어두고 일상의 감정을 살아가겠지요.


그러니 오늘은, 당분간은. 그리움 한 단을 잘 움켜쥐어 보렵니다. 여러분은 오늘 어떤 그리움을 엮어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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