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현금을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카드 한 장이면 못 사는 게 없으니까요. 몇 백 원짜리 아이들 사탕 하나도 카드로 결제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세상입니다. 겨우 다섯, 일곱 살인 제 아이들에게도 카드는 만능입니다. 엄마가 맛있는 것을 사줄 때도, 장난감을 사줄 때도, 키즈카페에 데려가줄 때도, 언제 어디서나 카드를 척하고 꺼내니까요. 이 카드 한 장을 갖기 위해서, 카드의 결제일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서 애써온 날들을 떠올리면, 참 처절했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스물여덟에 교직에 들어왔습니다. 당시에는 카드사의 영업사원분들이 교무실에 찾아와 좋은 카드라며 카드 발급을 권유하는 일이 흔하던 때였습니다. 얼떨결에 첫 카드를 발급받았어요. 이십 대 후반에 말이에요. 당장 현금이 없어도 갖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있고,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매력이었습니다. 그 매력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보면 이내 카드 결제일이 돌아왔어요. 월급날로부터 정확히 3일 후, 기다렸다는 듯이 결제 금액이 빠져나갔습니다. ‘월급이 통장을 스친다’라는 표현을 정확히 이해했어요.
수준에서 감당할 수 없는 명품을 사거나, 과하게 사치를 하는 편이 아닌데도 그랬습니다. 각종 공과금을 내고, 원룸 생활에 필요한 생필품을 사고, 먹는 것과 입는 것을 해결하고, 소소한 문화생활이나 사회생활을 누리는 정도였는데도 카드값은 언제나 상상 이상이었어요. 한도를 줄이면 어차피 현금을 써서라도 메우게 되는 소비 수준이었기 때문에 그냥 감당하기를 선택했었습니다.
‘카드 키드(박성우)’는 카드에 빚진 삶을 풍자한 시입니다. 시에서 ‘카드 키드’로 묘사되는 이들은 ‘언제 취직할 거니’를 지나 ‘언제 결혼할 거니’까지의 시기에 와있다는 것으로 보아 이삼십 대의 직장인입니다. 이 시대의 직장인들이 대체로 그렇듯, 이들 역시 카드에 얽매인 삶을 살아요. 이들이 카드 키드가 되기 위해 노력한 시간은 '교양 없이 품위 있었고/뻔뻔하게 자랑스러웠다'고 묘사됩니다. 카드 키드가 된 이후의 삶은 '근사하고 푹신하며(1연), 찬란하고 아늑하며(2연), 대견하고(3연) 기적적(4연)'이지만 실로는 "벅차고(1연), 처연하다(2연)'고 합니다.
이 시를 처음 만나고, 읽고 옮겨 쓰는 동안 어쩐지 자꾸 슬퍼졌습니다. 그건 분명히 슬픔이었어요. 카드 키드가 되기 위해 '품위 없고 뻔뻔하게' 스펙에 몰두하는 취준생의 모습이 스쳤고, 무사히 카드 키드가 된 후에는 ‘벅찬’ 삶을 ‘버티’는 직장인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그 시간을 지나왔기에 더 애틋했던 것 같아요. 시를 자세히 곱씹어보면, 앞서 고백한 저의 지난날처럼 대단한 소비를 하는 것이 아닌데도 카드 키드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출근을 위해 옷과 구두를 사고, 직장동료의 결혼식에 참석하며, 원룸을 얻고, 패스트푸드를 먹는 삶입니다. 그럼에도 ‘월급날 받은 급여는 어김없이 카드에게 옮겨가’ 요. 참 씁쓸하지요.
이제 저는 카드 키드라 칭할 수는 없습니다. 원룸을 벗어났고, 패스트푸드를 자주 먹지 않으며, 직장 동료의 축의금을 크게 고민하지 않으니까요. 그렇지만 카드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니, ‘카드 어덜트’쯤으로 칭해야 할까요. 키드에서 어덜트가 되면서 카드 명세서의 항목값은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카드 결제일이 오면 마음이 분주합니다. 때론 카드가 지켜주는 직장생활임을 부정할 수도 없고요.
이 시가 실려 있는 <웃는 연습>이라는 시집에 이런 시가 나옵니다.
회사원(박성우)
대지도 알약 하나를 삼키듯 하루해를 넘긴다
제목과 시의 매치가 기가 막힌 시입니다. 해가 넘어가는 순간이 마치 '대지가 알약 하나를 삼키는’ 것과 같다고 해요. 회사원의 하루가 그렇다는 말이겠지요. 회사원으로 하루를 무사히 살아내는 일은 그만큼 고단하고 벅찬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카드가 지켜주는 직장생활이든 뭐든 어떤가요. 우리 모두 오늘 하루를 무사히 잘 넘겼는걸요!
금요일입니다. 어찌 되었든 주말 동안에는 카드값 걱정 대신, 회사 걱정 대신, 평안하고 행복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