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쳐 신은 양말, 겹쳐 쓴 가면

겹쳐서(이병률)

by 진아

[시 쓰는 여름] 스물두 번째 시


겹쳐서(이병률)


양말에 구멍이 났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넘기려 했지만 신경이 많이 쓰였다


오래 있어야 하는 자리였고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양말 구멍으로 내민 살이

꼭 그곳에 있기 싫은 내 얼굴 같았다


구멍이 나는 쪽은 항상 오른발이었다

신경쓰면서 살지 않았지만

신경쓰지 않아도 집요하게 한쪽에서만 구멍이 생겼다


하긴 사람만 없으면 그것도 별일은 아니겠지만

밖으로 나가 새 양말을 사서 얼른 신었다

신었던 양말을 벗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 위에다 신었다


속옷을 두 장 입는 사람도 있다


가면과 가면은 겹쳐진다

쓰고 있는 가면 위에 다른 가면을 겹쳐 쓸 수도 있다


만두피가 생겨 만두를 빚을 일이 생겼는데

안에다 채울 것이 없어 냉동만두를 넣고 통째로 감쌌던 적 있다


출처:<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문학동네, 2020


저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 무척이나 민감한 사람입니다. 예의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고, 도덕적 기준 또한 무척 높아요. (스스로도 좀 피곤할 지경입니다.) 오늘의 시, ‘겹쳐서(이병률)’의 첫 행을 읽자마자 마치 제 양말에 구멍이 난 듯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양말에 구멍이라니?!' 심지어 ‘오래 있어야 하는 자리’이자,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이라니요. 새 양말을 사서 구멍 난 양말을 ‘벗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겹쳐 신는 모습에 너무 공감이 되어 헛웃음이 났습니다.


저와 같은 집에 사는 남자(네, 남편 맞습니다.^^;;)는 저와 완전 반대입니다. 예의가 없다는 말은 아니고요.^^ 다른 사람의 시선에 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상대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이 아니라면요. 같은 상황에서 남편이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상상해 봤어요. “어, 양말에 구멍 났네. 뭐 그럴 수도 있지.”라며 무심하게 넘겼을 것 같아요. 새 양말을 사러 가는 수고도, 구멍 난 양말을 벗지도 못하고 겹쳐 신는 상황도 남편에게는 없는 일이었을 겁니다.


저와는 너무도 다른 성향의 남자와 함께 살면서, 자주 깨지고 부서졌습니다. 남편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도 많았지만, 가끔은 제 자신이 좀 답답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아주 당당하게 주장할 줄 아는 남편의 행동이 가끔은 부럽기도 했고, 호불호가 강한 성격 덕에 적이 많은 것 같지만 그만큼 편도 많은 남편의 인간관계가 내심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남의 시선에 얽매여서 정작 내가 좋아하는 건 말도 못 하고 지나간 순간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다 보니 진짜 내 사람이라 부를 만한 사람은 많지 않았던 인간관계. 모두를 돌아보게 되었어요.


내 마음보다 남의 시선을 우위에 놓고, 만인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욕심이 있으니 자연스럽게 가면을 겹쳐 쓰게 되었어요. 불편을 내색하지 않으려, 진심을 들키지 않으려, 항상 웃는 얼굴을 가면으로 썼고(화를 내야 하는 상황에서도요!) 늘 예의 바른 태도를 가면으로 썼습니다. (상대는 저에게 너무도 무례한 데도요!)


자꾸만 저를 덮는 가면의 개수가 늘어났고, 그러다 보니 ‘속옷을 두 장 입는 사람’이 되어버렸어요. 속옷은 저만 보는 옷입니다. 아주 은밀하고 내밀한 옷이지요. 그런데 그것마저 두 겹으로 겹쳐 입었다는 건, 자신을 속이는 단계에까지 이른 거예요. 만두피 이야기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만두피에 냉동만두를 감싸고는 만두를 빚었다고 스스로를 속이는(어쩌면 합리화하는) 것이죠.


‘내가 나를 모르겠다, 나조차 나를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나’의 진짜 모습은 뭘까, 고민했어요. 그 과정에서 글쓰기를 만났습니다. 하얀 백지 위에서 저는 구멍 난 양말 위에 새 양말을 덧신는 대신 구멍 난 양말을 벗어던지는 자아가 됩니다. 집요하게 드러나려는 ‘오른쪽 발가락’을 반기는 자아가 되어요. 글을 쓰는 동안만큼은, 내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어요. 사람들은 생각보다 남의 ‘구멍 난 양말’ 따위엔 크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요.


백지 위를 벗어난 일상에서는 여전히 구멍 난 양말 위에 새 양말을 덮기에 급급한 날들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글을 씁니다. 언젠가는 새 양말을 겹쳐 신는 대신, 당당히 구멍 난 양말로 자리를 채우는 저를 상상해요. 좀 더 나아가면 과감히 벗어던지는 모습도 상상해 봅니다. 그렇게 맨발이 되어, 머물고 싶지 않은 자리는 가볍게 박차고 일어서는 저를 떠올려 보기도 하고요. 상상만으로도 짜릿하네요.


오늘 하루도 많은 가면을 겹쳐 쓴 채 버거운 하루를 보내셨을 (저와 비슷한 성향의) 분들!

우리 오늘 밤만은 겹쳐 쓴 가면이든, 겹쳐 신은 양말이든, 겹쳐 입은 속옷이든 모두 훌훌 털어버리고 가볍고 편한 밤 보내기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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