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저녁, 그리운 저녁에 대하여

그 저녁에 대하여(송진권)

by 진아

[시 쓰는 여름] 마흔 번째 시


그 저녁에 대하여(송진권)


뭐라 말해야 하나

그 저녁에 대하여

그 저녁 우리 마당에 그득히 마실 오던 별과 달에 대하여

포실하니 분이 나던 감자 양푼을

달무리처럼 둘러앉은 일가들이며

일가들을 따라온 놓아먹이는 개들과

헝겊 덧대 기운 고무신들에 대하여

김치 얹어 감자를 먹으며

앞섶을 열어 젖을 물리던

목소리 우렁우렁하던 수양고모에 대하여

그 고모를 따라온 꼬리 끝에 흰 점이 배긴 개에 대하여

그걸 다 어떻게 말해야 하나

겨운 졸음 속으로 지그시 눈감은 소와

구유 속이며 쇠지랑물 속까지 파고들던 별과 달

슬레이트 지붕 너머

묵은 가죽나무가 흩뿌리던 그 저녁빛의

그윽함에 대하여

뭐라 말할 수 없는 그 저녁의

퍼붓는 졸음 속으로 내리던

감자분 같은 보얀 달빛에 대하여


출처: <자라는 돌>, 창비, 2011



바람의 온도가 미세하게 달라진 날입니다. 입추가 지났어도 무덥기만 하더니 태풍 하나를 보내고 나니, 확실히 이른 아침과 늦은 밤의 온도가 달라졌어요. 여름이 젊음과 열정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성숙과 그리움의 계절이지요. 달라진 온도와 바람이 마음을 스친 오늘, 왠지 그리움을 담뿍 담은 시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저녁에 대하여(송진권)’는 어떤 저녁을 떠올리게 하는 시입니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라는 첫 행은 뭐라고 말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그리움의 감정을 잘 담고 있어요. 그리움이라고 간단히 말했지만, 그리움만큼이나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이 있을까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으로)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치면서 가장 이해시키기 어려운 감정이 ‘그리움’입니다. 정말 많은 시들이 ‘그리움’의 정서를 품고 있는데요, 아직 십 대 후반인 아이들이 그리움의 정서를 제대로 이해하긴 쉽지 않아요. 그리움은 대체로 ‘잃은 것’, ‘사라진 것’, ‘돌이킬 수 없는 것’에 기인하는 감정입니다. 십 대는 잃은 것과 사라진 것,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마음에 품기보다 얻을 것, 도래할 것, 가질 것에 더 마음이 쏠리는 나이 같아요. 과거를 돌아보기보다는 미래를 내다보는 일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으니까요. 그리움이 또 어려운 감정인 것이, 단순히 ’좋아했던 것‘, ’행복했던 것‘과만 관련되는 감정도 아니예요. 아팠어도, 힘들었어도, 당시에는 지긋지긋했어도 돌아보면 그리움을 자극하는 일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친구 관계와 성적, 입시에 허덕이는 십 대 아이들은 지금이 제일 아프고 힘들고 지긋지긋한 순간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니 훗날 이 순간이 그리움을 자극할 순간이 될 거라고는 상상하기 어렵겠지요.


다시 시의 이야기로 돌아가 볼게요. 화자(시 속에서 말하는 이)가 그리워하는 순간은 어느 저녁입니다. 마당에는 별과 달의 그림자가 훤히 드리우고, 일가친척들이 모여 앉아 포실포실 잘 삶아진 감자를 나눠먹어요. 친척을 따라온 개가 꼬리를 흔들고, 외양간에는 소가 꾸벅꾸벅 졸고 있습니다. 그토록 평화롭고 고요하면서도 소란스러웠던 저녁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화자의 말에 백번 공감합니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라는 말에는 한두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깊고 진한 감정이 녹아 있어요. 행복했고, 즐거웠고, 따뜻했고, 그립고,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저릿하고, 뭉클하고...


그런 저녁, 있으신가요?


시를 읽으며 불현듯 떠오른 저녁들이 꽤 많았습니다. 얼마전 글에 썼던, 할아버지가 “진아, 영어, 하드 하나 사온나!” 하시던 한겨울의 저녁도, 명절음식을 준비하는 할머니 곁에서 전을 부치고 콩나물을 다듬던 저녁도, 오랜만에 만난 외가 식구들과 작은 방에 빼곡히 둘러앉아 맥주를 마시던 늦은 밤도, 엄마와 여동생과 떠났던 가족여행에서 숙박 장소를 정하지 못해 모텔과 민박집을 전전하던 저녁도, 엄마의 늦은 퇴근에 동생과 손을 잡고 달리던 골목길의 밤도…. 일일이 다 쓰지도 못할 만큼 많은 저녁과 밤이 떠올랐어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경제적으로는 어려웠지만, 마음만은 풍요로울 수 있었던 건 그런 저녁들이 숱하게 많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요. 당시에는 지극히 일상적인 저녁들이었는데, 대단히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도 못한 시간들이었는데, 지나고 나니 이렇게 애틋해지네요.


엄마로서 내 아이들에게 어떤 저녁을 선물해야 하나 생각합니다. 특별히 맛있는 메뉴, 새롭고 멋진 공간 그런 건 필요치 않은 것 같아요.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을 주고받고, 사랑이 오고 가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저녁이면 충분할 것 같아요.


오늘 저녁은 어떠셨나요? ‘뭐라고 말해야 하나’ 고민될 만큼, 하나로 딱 정의하기 어려운 시간이셨을까요.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우리에게는 내일의 저녁이, 모레의 저녁이 남아 있으니까요. 따스하고 사랑스러운 저녁들을 쌓아가시길. 그리하여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그리워할 장면을 더해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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