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라보노(허수경)
[시 쓰는 여름] 마흔두 번째 시
후라보노(허수경)
젖은 시야 안으로 들어오던
조용한 기척
등록금 받으러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오는
춘천행 심야 버스였다
쏟아진 머리카락 아래로
껌 하나를
건네오는 두툼한 손이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껌을 욱여넣었다
귀밑으로 침이 고였다
껌 종이를 작게 작게 접으며 나는
후라보노 후라보노
콧물 섞인 껌을 씹었다
단물이 다 빠질 때쯤
들썩이던 어깨도 잦아들고
그 어깨 위로
무거운 音처럼 떨어지던
모르는 이의 고단함
흔들리는 시외버스
껌이 삭도록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내가 베푼 선행이란
그게 다인지 모른다
출처: <회복기>, 문학동네, 2022
스스로가 보잘것없이 여겨지는 날이 있습니다. 뭐 하나 되는 일이 없고, 누구 하나도 내 편이 아닌 것 같은 날. 그런 날에 여러분은 무너진 마음을 어떻게 회복하시나요. 예전에 어떤 책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그런 날이면 애써 사소한 선행을 베푼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어떤 책이었는지는 아무리 떠올려봐도 까마득한데, 그 내용이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생각해 보면 타인을 위해 몸과 마음을 내어주는 일은 결국, 내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일인가 봅니다.
‘후라보노(허수경)’은 꼭 그런 날을 배경으로 하는 시입니다. 화자는 ‘등록금 받으러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오는/춘천행 심야버스’ 안에 있습니다. 그 마음이 어떨지는 충분히 짐작됩니다. 눈물 방울과 함께 머리칼을 아래로 떨어뜨린 채 서러움에 젖어 있는 화자에게 누군가 불쑥 ‘후라보노(껌)’를 내밉니다. 어쩐 일인지 화자는 거절하지 않아요. 오히려 어깨가 잦아들 때까지, 콧물까지 훌쩍이며 껌을 씹습니다. 껌을 씹으며 화자의 마음도 가라앉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내어준 마음 한 조각에 화자의 서러움도 삭아갑니다.
이번에는 화자의 어깨 위로 누군가의 고단함이 떨어져요. ‘무거운 음처럼’ 툭 떨어지는, 모르는 이의 머리를 이번에는 화자가 받아냅니다. 그의 단잠이 깰까 봐 입안의 껌도 씹지 않아요. 질기고 질긴 껌이 ’삭도록’ ’움직이지 않‘았다니, 아마 화자는 온 마음을 다해 그의 고단함을 받아냈을 겁니다. ’이 세상에 내가 베푼 선행이란/그게 다인지 모른다‘라지만, 이 시를 읽은 누구라도 그 선행이 사소하다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내 마음이 편안하고 여유로울 때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어주기 쉽습니다. 허나 내 마음이 괴롭고 고단할 때는 (누군가의 마음을 기대하면 했지) 내 마음을 내어주기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모르는 이를 향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시를 읽으며 깨달았습니다. 내 마음이 지옥일 때,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내어놓으면 마음의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요. 그래도 이 세상에 나란 존재가 조금은 필요하구나, 안심하게 된다는 것을요.
각종 사건 사고로 마음이 자주 무너집니다.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내어놓거나 사소한 선행을 베풀기는커녕, 누군가의 마음을 송두리째 난도질하고 상상할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르는 이들의 이야기가 판을 치는 날들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무너지는 마음들의 연대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타인을 위해 내 마음을 내어놓는다기보다는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마음을 지킨다 생각하며, 어쩌면 그것이 지극히 이기적일지라도, 그렇게 아픔을 나누고 슬픔에 손 내미는 마음이 필요하지 않나. 그런 거창한 생각을 해보는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