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첫 번째가 나를(김혜수)
[시쓰는가을] 첫 번째 시
모든 첫 번째가 나를(김혜수)
모든 첫 번째가 나를 끌고 다니네
아침에 버스에서 들은 첫 번째 노래가
하루를 끌고 다니네
나는 첫 노래의 마술에서 풀려나지 못하네
태엽 감긴 자동인형처럼 첫 노래를 흥얼거리며
밥을 먹다가 거리를 걷다가
흥정을 하다가 거스름돈을 받다가
아침에 들은 첫 번째 노래를 흥얼거리네
모든 첫 번째 기척들이 나를 끌고 다니네
첫 떨림 첫 경험과 첫사랑과 첫 눈물이
예인선처럼 나를 끌고
모든 설레임과 망설임과 회한을 지나
모든 두번째와 모든 세번째를 지나
모든 마지막 앞에 나를 짐처럼 부려놓으리
나는, 모든, 첫번째의, 인질,
잠을 자면서도 나는
아침에 들은 첫 노래를 흥얼거리네
나는, 모든, 첫 기척의, 볼모
시집 『이상한 야유회』(창비, 2010)
오늘부터 인스타그램에서 [시쓰는가을]을 시작했습니다. [시쓰는가을]은 시필사 모임입니다. 매일 한 편의 시를 배달해 드리면 함께 하는 멤버분들은 시를 필사하고 단상을 나눠주세요. [시쓰는봄]부터 시작해서 [시쓰는여름]을 거쳐 [시쓰는가을]까지, 벌써 세 번째 계절을 맞이했습니다. 함께 해주시는 분들 중 몇 분은 봄, 여름, 가을까지 모두 함께 하고 계세요. 이곳, 브런치에는 따로 필사모임을 운영하지 않는 대신, 인스타그램에 배달하는 시를 소개합니다. 저의 단상을 덧붙여서요.
[시쓰는여름]을 연재할 당시, 학교의 기말고사 기간, 아이들의 방학 기간, 2학기 개학, 두 아이의 입원 등 힘든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꿋꿋이, 매일 한 편의 시를 배달하고 단상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읽어주시는 분들 덕분이었어요. [시쓰는가을]도 잘 부탁드립니다.^^
[시쓰는가을]의 첫 번째 시는 ‘모든 첫 번째가 나를(김혜수)’입니다. 이 시는 어느 계절이 되었든, ‘첫날, 첫 번째 시’로 소개해야지 마음을 먹고 있었어요. 봄과 여름을 놓치고 가을에 와서야 첫 번째 시로 소개합니다.
‘아침에 버스에서 들은 첫 번째 노래가/하루를 끌고 다니네‘라는 구절에 공감하는 분들이 무척 많을 것 같아요. 아침 출근길에 혹은 등굣길에 우연히 들은 노래 하나가 하루 종일 입가를 맴도는 경험, 누구나 한 번쯤은 하는 일입니다. ’첫 번째‘가 얼마나 강한 인상을 남기는지 증명하는 일이지요.
‘처음’은 특별합니다. 처음을 뜻하는 관형사 ’첫‘이 붙은 말들만 늘어놓아봐도, 처음이 얼마나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지 알 수 있어요. ’ 첫눈, 첫돌, 첫사랑, 첫아이, 첫해, 첫 만남, 첫 키스, 첫 데이트, 첫 월급, 첫 출근, 첫 직장…‘ 평범한 단어도 ’첫’을 만나면 모두 특별해집니다.
지금 익숙한 사람도, 익숙한 공간도, 익숙한 일도, 익숙한 마음도 모두 ‘처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숨막히는 떨림을 느끼던 처음이, 이 공간에 들어서며 심호흡 한 번을 해야했던 처음이, 이 일을 시도하며 가슴 뛰던 처음이, 이 마음에 설레고 두근거리던 처음이, 분명히 모든 처음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이 사람 곁에, 이곳에, 이 일에, 이 마음에 익숙해졌어요. 더는 설렘이나 망설임은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모든 처음의 인질이자 볼모’가 되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잊고 있었지만 분명 설레고 망설였던 순간들이 있었어요. 곁에 있는 이와의 처음을, 이 공간에 첫발을 디뎠을 때의 감각을, 이 일을 시작하던 때의 긴장을, 이 마음을 처음 먹던 때의 간절함을 다시 한 번 떠올립니다. 처음이 끌고온 두 번째와 세 번째, 그 뒤로 숱한 시간의 발자국을 되새겨봐요.
처음을 떠올린다고 해서 익숙하던 사람이, 공간이, 일이, 마음이 갑자기 새롭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에도 분명 처음이 있었다는 사실이 여러 생각을 하게 합니다. 설렘에서 출발해서 익숙함에 도착하기까지 애써온 시간과 마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싶어요. 그것만으로도 익숙함은 감사함으로 다가옵니다.
앞으로 만들어갈 처음을 상상합니다. 여전히 가보지 못한 길이 많고, 나에게 처음은 무한히 열려 있다 생각하니 어쩐지 용기가 생기기도 합니다. 내일 아침에는 좀 더 좋은 문장으로, 좋은 마음으로 하루의 처음을 맞이해봐야겠어요. 종일 좋은 문장을 흥얼거리고, 좋은 마음을 되뇌다 보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좋은 어딘가에 닿아있을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