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초가을날

초가을비(도종환)

by 진아

[시쓰는가을] 다섯 번째 시


초가을비(도종환)


마음 무거워 무거운 마음 버리려고 산사까지 걸어갔었는데요

이끼 낀 탑 아래 물봉숭아 몇 포기 피어있는 걸 보았어요

여름내 비바람에 시달려 허리는 휘어지고

아름다운 제 꽃잎이 비 젖어 무거워 흙바닥에 닿을 듯 힘겨운 모습이었어요

비안개 올리는 뒷산 숲처럼 촉촉한 비구니 스님 한 분

신발 끄는 소리도 없이 절을 돌아가시는데

가지고 온 번뇌는 버릴 곳이 없었어요

사람으로 태어난 우리만 사랑하고 살아가며 고통스러운 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만물은 제가 지고 선 세속의 제 무게가 있는가 봐요

내리는 비 한 천년쯤 그냥 맞아주며

힘에 겨운 제 무게 때문에 도리어 쓰러지지 않는

석탑도 있는 걸 생각하며

가지고 왔던 것 그대로 품어 안고 돌아왔어요

절 지붕 위에 초가을비 소리 없이 내리던 날.


출처: <당신은 누구십니까>, 창비, 1999


어제부터 비가 옵니다. 이곳은 장대비가 쏟아지다 가랑비로 바뀌는 듯하더니 다시 장대비가 되었다가 이제는 비를 머금은 구름만 가득하네요. 그곳의 날씨는 어떤지 궁금합니다.


온도나 습도만 생각하면 봄과 가을은 큰 차이가 없는데요, 분위기는 완전히 다릅니다. 봄이 시작하고 피어나고 치고 오르는 계절이라면, 가을은 저물고 지고 떨어지는 계절이니까요. 덕분에 봄비는 신선하고 산뜻하지만 가을비는 애틋하고 아련합니다.


'초가을비(도종환)'는 비 오는 가을날을 배경으로 한 시입니다. 배경만으로도 어쩐지 마음이 가라앉는 시예요. 구구절절한 사연은 모르지만 화자에게는 무거운 사연이 있어요. 뚜렷한 길은 보이지 않고 마음만 무거운 날, 산사(山寺)를 찾아갑니다. 조용한 산사를 걸으며 시름을 좀 내려놓고 싶어서요. 그런데 산사를 찾아가는 길에 눈길을 끄는 생명을 만납니다. 바로 물봉숭아예요. 물봉숭아는 '여름내 비바람에 시달려 허리는 휘어지고/아름다운 제 꽃잎이 비 젖어 무거워 흙바닥에 닿을 듯 힘겨운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속세를 떠나 온 비구니 스님도 만납니다. '신발 끄는 소리도 없이' 절을 도는 비구니 스님은 속세에서 어떤 삶을 사셨을까요. 모든 스님이 특별한 사연이 있지는 않겠지만, 저에게 스님의 이미지는 백석 시인의 '여승'이 강렬해서인지 스님에게도 그리 가볍지 않은 사연이 있을 것만 같아요.


화자는 '가지고 온 번뇌를 버릴 곳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리디 여린 물봉숭아도 비바람을 견디며 꽃을 피우고 말 못 할 사연을 품은 채 속세를 떠나온 비구니 스님도 신발 끄는 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절을 도는데, 자기가 지고 있는 마음의 무게를 어디에 버리겠어요. 결국 화자는 아무것도 버리지 못한 채, '이 세상 모든 만물은 제가 지고 선 세속의 제 무게가 있는가 보다' 여기며 다시 '품어 안고 돌아옵니다'. '힘에 겨운 제 무게 때문에 도리어 쓰러지지 않는 / 석탑'도 있다는 깨달음과 함께요.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무게를 지고 살아갑니다. 때론 이 무게에 짓눌려 더는 일어설 수 없겠다, 싶은 좌절이 몰려옵니다. 누가 좀 함께 져주었으면 싶은 순간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몫은 결국 자기가 져야 하는 것 같아요. 누구에게도 전가할 수 없지요. 그나마의 위안이라면, 누구나 자기만의 무게를 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만 힘든 것도 아니고 나만 아픈 것도 아니에요. 사람만 그런 것도 아니고 생명체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물봉숭아 같은 식물도, 석탑 같은 무생물도 모두 저마다의 비바람을 버티고 있습니다.


오늘 시는 날씨와 계절을 고려해서 고른 시인데요. 시를 여러 번 읽고 함께 필사하는 멤버분들의 단상까지 읽다 보니, 그저 날씨와 어울리기만 하는 시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른 아침에 이 시를 배달하고도 오늘 어깨에 지워진 무게가 무겁다 투정하던 참이었는데, 글을 쓰다 보니 민망함과 머쓱함이 몰려오네요.


초가을비가 내리는 오늘, '어깨를 누르는 삶의 무게를 잘 짊어져야지!' 마음먹어봅니다. 일단 내일은 주말이니, 무거운 짐 잠시만 부려놓고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채워야겠습니다. 튼튼하고 단단한 몸과 마음으로 다시 한번 영차! 힘을 내야 하니까요.


많이 웃고 덜 지치는 주말 보내시길!



<덧붙여 드리는 시>

여승(백석)
여승은 합장을 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 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 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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