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끝. 벌써 그리운, 친정 그리고 엄마.

손을 흔든다는 것(정호승)

by 진아

[시쓰는 가을] 열두 번째 시


손을 흔든다는 것(정호승)


잘 있어라

눈빛은 차마 너를 보지 못하고

잘 가거라

마른침을 삼키며

호스피스 병동 병실에 누워

마지막으로 너를 향해

손을 흔든다는 것

창가의 어린 나뭇가지를 향해

나뭇가지에 앉은 흰 눈송이를 향해

차마 슬프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천천히 손을 흔든다는 것

인간이 인간에게 마지막으로

말없이 손을 흔든다는 것

그것은 풀잎이 땅을 흔든다는 것

별들이 밤하늘을 흔든다는 것

그래도 어디에서든

그 어느 때든

다시 만나자는 것


출처:<여행>, 창비, 2013


긴 추석 연휴 잘 보내셨나요? 지난 목요일부터 어제 화요일까지, 6일간의 긴 연휴는 마치 가을 방학처럼 느껴졌습니다. 일요일쯤에는 ‘아직 휴일이 이틀이나 더 남았다고?’를 되뇌며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네요. ^^


이번 휴가는 저에게 여러모로 특별했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친정에서 나흘이나 머물렀고, 자주 만나지 못하는 여동생과도 시간을 많이 보냈거든요.


친정엄마는 저희 식구와 동생네를 맞이하기 위해 명절이 되기 훨씬 전부터 장을 보기 시작했어요. 손주들이 먹을 것과 딸 내외가 먹을 것을 나누고, 명절음식과 두 사위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을 나누어 엄청난 양의 음식을 준비하셨어요. 그러면서도 식사 때마다 “한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상에 차린 게 없냐”라며 아쉬워하셨습니다. 가끔은 미안해하기도 하셨어요. “엄마, 여기 있는 것도 다 못 먹겠어요! 걱정 마요. 걱정 마!” 엄마의 아쉬운 마음을 덜어주고자 큰소리를 쳤지만, 그런 말로 엄마의 마음을 덜어줄 수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고, 엄마가 깎아준 과일을 먹고, 엄마가 타준 커피를 마셨습니다. 설거지라도 하려 하면 잽싸게 수세미를 낚아채고는 “너희들 집에서나 많이 해라.”라며 면박 아닌 면박을 주는 엄마 덕에, 친정에 머무르는 동안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호사를 누렸네요. 겨우 상에 수저를 놓고, 밥그릇에 밥을 퍼담는 일만으로도 엄마는 충분하다고 했어요. 이렇게 호사를 누리려고 온 건 아닌데, 생각하면서도 엄마 그늘에서 얻어먹는 밥이 너무 맛있었습니다. (돌이켜보니 오랜만에 참 철없는 시간을 보냈다 싶습니다.)


긴 시간을 집에만 있는 것을 답답해하는 아이들 때문에 바다를 보러 갈 마음을 먹었습니다. 연로하신 할머니를 혼자 모시고 사는 엄마는 평소에 외출을 거의 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오랜만에 딸들이 왔으니, 손주들이 왔으니 그 핑계로 같이 나가자고 조를 참이었어요. 제대로 말을 꺼내보기도 전에 엄마는 할머니를 혼자 두고 나갈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하셨어요. 내내 음식을 하고 손주들의 간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던 엄마에게 고요한 가을 바다를 꼭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엄마의 고집을 꺾을 길이 없었습니다. 다른 날도 아니고 명절에 할머니 혼자 덩그러니 남겨두는 것도 마음이 쓰였고요. 거동이 편치 않으신 할머니를 모시고 나갈 방법도 없어 우리끼리 대문을 나서면서도 괜스레 마음 한 편이 고단했습니다.


엄마 곁에서 사흘을 자고, 나흘째 되는 날 짐을 꾸렸습니다. 친정집에 갈 때는 캐리어가 하나였는데, 돌아오는 길에는 캐리어가 두 개가 되었습니다. 엄마는 선물로 들어온 좋은 과일들을 모두 제 캐리어에 넣어주셨어요. 묵직한 엄마 마음을 끌고 친정집을 나섰습니다. 두 손주의 손을 꼭 잡은 채 서있던 엄마는, 택시를 탄 우리들이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고 서계셨어요. 엄마의 안녕을 받으며, 안녕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엄마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뒤, 이런저런 시집을 뒤적이며 다시 시작할 [시쓰는 가을]을 준비하다 ’손을 흔든다는 것‘에서 그만 마음이 멈추어버렸어요. 분명 시에 등장하는 배경은 ‘호스피스 병동’이고, 손을 흔들며 건네는 인사는 ‘마지막’이라 제가 공감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는데요. 시어 몇 개만 바꿔보니, 꼭 엄마와 이별했던 며칠 전 장면이 고스란히 그려지는 겁니다.


(*진하게 표시한 부분이 바꾼 부분입니다. )


잘 가거라

눈빛은 차마 너를 보지 못하고

잘 가거라

마른침을 삼키며

왕복 6차선 도로 곁 택시 승강장에 서서

헤어지는 너를 향해

손을 흔든다는 것

길가의 어린 나뭇가지를 향해

나뭇가지에 매달린 노오란 은행을 향해

차마 슬프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천천히 손을 흔든다는 것

인간이 인간과 헤어지며

말없이 손을 흔든다는 것

그것은 풀잎이 땅을 흔든다는 것

별들이 밤하늘을 흔든다는 것

그래도 어디에서든

그 어느 때든

다시 만나자는 것


엄마를 떠나 오는 게 처음도 아니었는데, 이 시를 읽다 보니 그 이별이 하염없이 애틋해집니다. 두 딸의 식구들을 위해 며칠을 못 자고 못 쉬며 준비한 식사에도 먹을 게 없을까 마음 졸이던 엄마의 눈빛이 자꾸만 떠올라요. 딸들이 바다를 보러 나서던 걸음에 따라나설 엄두도 못한 채, 잠깐의 고요에 쪽잠을 잤을 엄마의 시간이 자꾸 그려집니다. 밀물처럼 쏟아졌던 식구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고요해진 집에서 혼자 맥주캔을 땄을 엄마의 작은 공간이 자꾸 생각납니다.


택시 안에서 잠깐 바라보았던 엄마의 안녕이, 손 흔듦이 이제야 땅과 하늘을 흔들 만큼 거대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딸. 조심히 잘 가렴. 또 만나자. 내 새끼들.‘ 했을 엄마의 마음이, 딛고 선 땅을, 머리 위 하늘을 출렁이며 쉼 없이 밀려옵니다.


너무 오래지 않아 다시 엄마를 만나러 가야겠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으실 엄마에게, 이 말을 꼭 드려야겠습니다. 엄마가 손 흔들며 빌어준 안녕 덕분에 우리는 언제나 안녕합니다. 고맙고 사랑합니다.


*[시쓰는 가을]은 제 인스타그램에서 매일 한 편의 시를 배달하고 필사하는 모임입니다. 브런치에서는 [삶의 맛을 바꾸는 시 한 스푼]이라는 매거진을 통해 시와 저의 단상을 매일(평일 기준) 발행하고 있어요. 원래는 매일 밤 10시-12시 사이에 발행하나, 오늘은 밤 발행이 어려워 이른 발행을 합니다. 내일부터는 다시 늦은 밤 뵐게요. 긴 연휴 끝, 무사한 하루 보내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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