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이 오르다(이대흠)
[시쓰는 가을] 스물다섯 번째 시
열이 오르다(이대흠)
개나리꽃이 병아리 부리 같다는 것은
새삼스런 생각이 아니다
보이는 꽃마다 새 부리가 박혔다
참새 부리 같은 별꽃 딱따구리 부리 같은
산자고 오리 부리 같은 목련
꽃의 부리는 한사코 제 몸을 향해 있다
뒤란에 매화향 가득하다
참 많이 앓았겠다
출처: <귀가 서럽다>, 창비, 2010
시를 좋아합니다. 여러 이유에서 그러하지만, 딱 하나만 말해보라면 '시적 시선' 때문이에요. 익숙한 대상을 새롭게 보게 하고, 흔한 대상을 특별하게 보게 하는 ‘시적 시선’이요. 그런 점에서 시는 참 신비로운 문학 갈래예요. 시어와 일상어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고, 시에서 대상으로 삼는 것도 대체로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인데 ‘시적 시선’이 가미되는 순간 어쩜 마법처럼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오는지요.
오늘 드리는 시, ‘열이 오르다(이대흠)’도 그런 시였습니다. 꽃을 좋아하는 편이라 이제껏 많은 꽃을 애정 어린 마음으로 봐왔다고 생각했지만, 꽃에서 ’새의 부리‘를 떠올린 적은 없었어요. 그러니 꽃의 부리가 제 몸을 향해 있다는 생각은 더군다나 해본 적 없고요. 어쩜 시는, 시인은 이런 시선을 가졌을까요.
이 시를 읽고 개나리꽃을 찾아봤어요. 너무도 익숙한 개나리꽃에서 ‘병아리 부리’가 보이지 않겠어요? 별꽃과 산자고는 처음 들어보는 꽃이었는데, 이미지 검색을 해보니 정말로 참새 부리, 딱따구리 부리 같은 거예요. 목련은 떠올리자마자 오리 부리였어요. 정말 너무너무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이미지들이 시 한 편을 통해 꼭 맞는 짝을 만난 것처럼 단번에 연결되다니요! (궁금하신 분들은 저처럼 이미지 검색을 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이 시에서의 가장 중요한 시행은 ‘꽃의 부리는 한사코 제 몸을 향해 있다’가 아닐까 하는데요. ‘새의 부리’라고 하면 어떤 동사가 함께 떠오르시나요? 저는 ‘쪼다’라는 동사가 떠올라요. ‘쪼다’의 사전적 의미는 ‘뾰족한 끝으로 쳐서 찍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꽃의 부리는 한사코 제 몸을 향해 있다‘를 다시 살펴보면, ’꽃은 꽃으로 피어나기 위해, 부리로 제 몸을 쳐서 찍어야만 한다‘로 읽어낼 수 있습니다. 얼마나 거대한 고통을 견뎌야 꽃을 피워낼 수 있는지 새삼 생각해 봐요. 뒤란에 퍼진 매화향을 맡으며, ’참 많이 앓았겠다‘ 연민하는 화자의 시선이 참 따스합니다.
비단 꽃뿐일까요. 우리의 생도 그러합니다. 부리를 바깥쪽으로 세우고 세상을 쪼는 일은 차라리 쉬울 수 있어요. 그렇게 되면 고통은 내 몫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온전한 ‘나’로 피어나려면 자기 자신을 쳐서 찍어내는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부리를 몸 쪽으로 향해 세우고, 끝없이 스스로를 찍어내야 해요. 상상만으로도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죠.
우리는 그런 과정을 ‘성숙’이라고 부릅니다. 성숙에서 ‘성’은 ‘이루어지다, 갖추어지다‘는, ‘숙’은 ‘여물다, 무르익다‘의 의미를 가진 한자어예요. 여물고 무르익어 무언가를 갖추어가는 과정이 쉬울 리 없지요. 고통스러운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그 과정의 끝에서 ’나’라는 빛깔과 향기를 지닌 꽃을 피워낼 수 있다면 견딜 만한 고통이지 않을까요. 시에서처럼, 나의 고통을 알아차려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테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