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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Nov 05. 2024

낡고 오래되어 다정한 곳들을 추억하며.

어쩌다 버스 정류장(유현아)

[2024 시 쓰는 가을] 여섯 번째 시


어쩌다 버스 정류장(유현아)

간판을 수시로 바꿔 달던 상가의 지붕들은 불빛 대신 달빛을 머금고
꼬리가 뭉툭한 단골 고양이는 일정한 시간에 만나던 손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머리카락 휘날리며 달리던 오토바이 배달 소년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조는 날이 더 많던 갈빗집 사장님은 유리문에 X를 끊임없이 긋고 있는

아파트 그림자는 거대한 괴물의 식탐처럼 낮은 지붕의 가게들을 집어삼키고
공가 딱지가 붙은 가게의 벽들은 날개를 펼치며 기하급수적으로 복제되고 있다

나의 단골 가게들이 하나둘 서서히 땅속으로 꺼지고 있다
어둠이 각질처럼 켜켜이 쌓여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낯선 동네의 이방인처럼 버스를 기다린다

사라진 동네의 버스 정류장은 어정쩡하게 흔들리고
익숙한 손을 기다리던 고양이는 터덜터덜 어둠을 횡단하고 있다

오랫동안 다정했던 동네가 그곳에 있었다

출처 : <슬픔은 겨우 손톱만큼의 조각>

 

오늘의 시는 지극히 개인적인 추억으로 고른 시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이라고 말했지만, 요즘 같이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비단 저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 같아서 용기 내 골라보았어요. 사라지는 것들, 낡은 것들, 그리하여 오랫동안 다정했던 것들에 관한 시, ‘어쩌다 버스 정류장(유현아)’입니다.


이 시는 특별한 해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화자인 ‘나’는 도시 재개발로 인해 다정한 곳을 잃었어요 ‘거대한 아파트의 그림자’에 ‘낮은 지붕의 단골 가게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동네를 떠돌던 익숙한 고양이도 갈 곳을 잃었습니다. 동네는 사라졌지만 버스 정류장만은 여전히 남아 ‘어정쩡하게 흔들리고’ 있어요. ‘오랫동안 다정했던 동네’라는 구절로 미루어볼 때, ‘나’에게 사라진 동네는 꽤 애틋한 추억이 많이 남은 동네인 것 같아요. 아마도 유년기의 다정한 추억을 한가득 품은 동네일지도 모르지요.


제가 이 시에 특별히 공감한 이유는, 제 유년기의 모든 시간이 녹아있던 동네가 도시 재개발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꼭 시의 화자처럼, 저는 ‘오랫동안 다정했던 동네’를 잃은 당사자이기 때문이에요.


저는 그곳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어요. 성인이 되고도 십 년 가까운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지요. 삼층짜리 작은 단독 주택. 너무나 작고 단출했지만, 부족하거나 모자라다 생각하지 않았던 우리 집. 할아버지와 할머니, 엄마와 여동생, 저까지 다섯 식구가 숨결을 공유하고 삶의 희로애락을 나누며 웃고 울던 우리 집. 오래되어 낡은 집이었지만, 그리하여 가끔은 이름 모를 벌레의 출몰로 뜬눈으로 밤을 새기도, (그 벌레가 나오는) 악몽을 꾸기도 했지만,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던 우리 집.


지금 그 집이 있던 자리는 재개발로 대단지 아파트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재개발이 결정되기 직전에 이미 저는 그 집을 떠나 독립을 했어요. 이후로 한 번도 그 동네를 찾지 않았습니다. 이미 재개발이 완료된 그 동네는 쓸쓸하고 적막한 분위기는커녕, 더 화려하고 소란한 동네가 되었습니다. 그곳에 가면 어쩐지 길을 잃을 것만 같아서 가보지 않았어요. 낡고 초라했던, 하지만 더없이 따스하고 다정했던 그곳에 대한 기억은 제 마음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예전에 이곳 브런치에 오래된 옛집의 기억을 글로 썼던 적이 있어요. 그 글을 읽어주신 다정한 독자 한 분이 제게 자신의 고향집 이야기를 들려주신 적이 있어요. 바다 근처의 작은 집, 집 앞에는 봄내음 가득 품은 때죽나무 꽃이 피는 집, 그곳에서 갓 잡은 해산물을 나눠 먹던 추억 같은 것들을요. 그 독자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분의 아름답고 다정한 집은 오래도록 그곳에 머물러 위안이 되었으면 기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낡은 것들이 쉽게도 사라지는 세상에서 나의 오랜 기억을 품은 공간이 남아 있다는 건, 살아가는 순간마다 말할 수 없는 큰 위안이 되니까요. 저의 옛집은 기억에만 남아 있는 공간일지라도, 추억할 때마다 위안이 되는 걸 보면 마음을 주었던 공간의 힘은 꽤 큰 것 같아요.


낡은 것들이 새것으로 교체되는 주기가 점점 빨라지는 듯합니다. 어제까지 그 자리에 있던 가게가 오늘 아침에 사라지기도 하고, 며칠 전까지 그곳에 있던 건물이 오늘 보니 허물어져 있기도 한 세상입니다. 어쩐지 오래 기억하고 다정하게 품을 장소들이 자꾸만 사라지는 것 같아 쓸쓸한 마음이 됩니다.


가을이 와서일까요. 쓸쓸한 시들에게 자꾸 마음이 머무네요.

그러할지언정, 우리의 마음은 너무 쓸쓸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일은 조금 더 밝은 시로 인사드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오늘 하루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모두 평안한 밤 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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