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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Nov 06. 2024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삶이면 충분하다

어제보다 조금 더(이문재)

[2024 시 쓰는 가을] 일곱 번째 시

어제보다 조금 더(이문재)

어제보다 더 젊어질 수는 없어도
어제보다 조금 더 건강해질 수는 있다

어제보다 더 많이 가질 수는 없어도
어제보다 조금 더 나눌 수는 있다

어제보다 더 강해질 수는 없어도
어제보다 더 지혜로울 수는 있다

어제보다 더 가까이 갈 수는 없어도
어제보다 조금 더 생각할 수는 있다

어제보다 조금 더
어제보다 조금만 더

출처: <혼자의 넓이>


인생에 목표가 있으신가요? ‘무엇을 하겠다, 무엇이 되겠다, 무엇을 갖겠다’ 같은 구체적인 목표나, ‘어떻게 살겠다, 어떤 사람이 되겠다’ 혹은 ‘생을 어떻게 마무리하겠다 ‘ 같은 조금은 피상적이고 아득한 목표가요.


MBTI로 인간 유형을 설명하는 것들 좋아하진 않지만, 그 기준을 잠시 빌려오자면 저는 J형(계획형) 인간입니다. 일상의 루틴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예측하지 못한 이유로 루틴이 깨지면 스트레스를 받는 타입이에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저는 인생의 큰 목표 같은 것이 없습니다. 파워 J라고 명명되는 계획형 인간들은 인생의 목표를 위해 장기 계획, 단기 계획을 치밀하게 세우고 그 계획에 따라 움직인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점에서 생각해 보면 저는 계획형 인간과 거리가 먼 것 같아요.


저는 매일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에요. 그렇다고 매일 잘 사는 건 아니지만, 대체로 매일 해야 할 일 혹은 하고 싶은 일을 잘 정리해서 차질 없이 해내는 것에 만족을 느낍니다. 예를 들어, 요즘 저는 매일 두 시간 운동하기라는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지켜나가고 있어요. 일상에 두 시간의 운동 루틴을 집어넣기 위해서 얼마나 치밀하게 시간을 쪼개 사는지 모릅니다. 가끔은 제가 생각해도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을 정도로 매일의 루틴을 열심히 지켜내고 있어요.


과거에도 꽤 계획적인 사람이었지만, 그때는 오히려 큰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계획들을 세웠습니다. 수능 준비를 하던 입시생 때, 대학원을 준비하던 졸업준비생 때, 임용고사를 준비하던 임고생 때, 그때는 목표가 너무 분명하고 거대해서 자주 불안했어요. 그 불안을 낮추기 위해 촘촘한 단기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지켜나갔습니다.


임용에 합격하고, 인생의 큰 시험이 모두 끝났어요. 더는 장기 목표로 삼을 만한, 단기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향해 실천을 해나갈 동력이 없었습니다. 그냥 매일을 살았어요. 그때의 매일은 그저 그랬던 것 같아요. 그냥 되는 대로, 주어진 하루를 소비하는 매일. 그래도 그럭저럭 괜찮은 날들이었습니다. 나아지거나 나아간다는 감각 없이 그저 내 자리를 잘 지키고 있다는 것에서 안도감을 느끼는 그런 날들이었어요.


언제부터 죽음을 생각했는지 모르겠어요. 어느 순간부터 죽음이 멀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마흔이 다 되어갈 때쯤부터였던 것 같아요. 주변에 아픈 이들이 생기고, 가끔은 말도 안 되는 부고를 받으면서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어요. 거창한 장기 계획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깨달았다고 할까요. 그때부터였어요. 원대한 목표 같은 건 없더라도, 매일 아주 조금씩 더 나아지는 삶이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은.


<어제보다 조금 더(이문재)>라는 시를 말씀드리기 위해 긴 이야기를 했네요. 시의 내용 그대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할 때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들이 있습니다. ’더 젊어지는 것, 더 많이 갖는 것, 더 강해지는 것, 더 가까이 가는 것‘은 쉽게 가능한 것들이 아니죠. (더 젊어지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고요.) 하지만 ’더 건강해지는 것, 더 나누는 것, 더 지혜로워지는 것, 더 생각하는 것‘은 가능한 것들입니다. 어쩌면 ‘가능, 불가능’으로 나누기보다 ‘조금 더 쉬운 것과 조금 더 어려운 것’이라고 나누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어요. 이 부사를 생각해 보면 더 와닿으실 것 같아요.


아등바등 : 무엇을 이루려고 애를 쓰거나 우겨 대는 모양


앞서 나열한 상황들 중에 ‘아등바등’이라는 부사와 더 잘 어울리는 건 어떤 건가요? 이 부사가 ‘더 젊어지려고, 많이 가지려고, 강해지려고, 가까이 가려고’ 앞에 붙는 것이 ‘더 건강해지려고, 나누려고, 지혜로워지려고, 생각하려고’ 앞에 붙는 것보다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나요? 후자보다 전자가 ’ 애쓰고 우겨 대는 모양‘이라는 느낌을 더 강하게 주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러니, 더 젊어지고 더 가지고 더 강해지고 더 가까이 가는 것보다 더 건강해지고 더 나누고 더 지혜로워지고 더 생각하는 편이 조금 더 수월하고 어쩌면 훨씬 더 가능한 영역이 아닐까 해요.


삶을 살아가는 데 큰 목표도 무척 중요합니다. 현재의 어려움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에너지가 되니까요. 하지만 우리 인생은 유한하잖아요. 당장 일 년 후의 내가, 한 달 후의 내가, 어쩌면 내일의 내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요. 그러니 너무 거대한 목표에 오늘의 삶을 저당 잡히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어제의 나보다 한 걸음 나아갔다, 어제의 나보다 아주 조금 더 좋아졌다, 그런 것들을 충분히 감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잘 보내다 보면, 언제 이 생이 끝나더라도 끝나는 그 순간의 ‘나’는 생 전체에서 가장 나은 ‘나’가 되어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꽤 괜찮은 마지막이 될 것도 같아요.


오늘 글은 저 스스로 다짐하는 마음으로 쓴 글이기도 합니다. 큰 욕심 내지 말고, 어제보다 조금 더 건강해지고, 조금 더 나누고, 조금 더 지혜로워지고, 조금 더 생각하는 사람이 되자고. 스스로와 약속하며 긴 글을 마칩니다.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

푹, 잘 주무시면 좋겠습니다.

내일 또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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