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먹는 걸 좋아하다 보니 사실상 종목을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아마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굳이 콕 짚어 골라보라 한다면 나는 고기를 참 좋아하는 사람이다.
각자들 바쁜 주중에는 좀 대충 먹는 편이고, 그래도 주말을 맞이하면 메뉴를 제대로 골라 차려 먹는 편인데, 그러니까 바로 어제 주말에 정말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사건이 벌어졌다.
고기를 가장 건강하게 먹는 방법이란 물에 삶아 수육을 만드는 것이라 한다. 본질적으로 고기를 사랑하는 나로서는 그게 물에 들어갔다 나왔건 불 위에서 지글지글 구워졌건 그 어떤 상태이든 모두 대환영이지만, 그래도 이제 건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며 즐겨해 먹는 방법은 수육이다.
가뜩이나 김장철도 됐으니 단번에 떠오르는 건 돼지고기 수육일 텐데, 여러 부위를 도전해봤지만 그래도 단연코 가장 부드럽고 맛있는 부위는 삼겹살이다. 이 마법의 부위는 불판 위에 구우면 세상 고소하고 쫄깃함이 일품인데, 삶아도 그 부드러움을 어디에 감추질 못한다. 그러나 어쨌든 불판 위에서 지글대는 삼겹살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치 파블로프의 개가 된 듯 입안에 군침이 돌며 행복 스위치가 켜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나의 본능과 더불에 오랜 세월에 걸쳐학습된 자동 반응의 결합체이다.
보통 사진첩에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삼겹살 구이의 영롱한 모습
이런 완벽한 불판 환경을 마련할 수 없는 우리 집에선 여하 간에 건강을 '핑계'삼아 수육을 잘해 먹는데, 바로 어제도 그런 날이었다.
대한민국 대표 *돈이나 제주도 깜장 돼지를 자주 먹을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그래도 살림을 사는 여인네 입장에선 가정 경제의 발란스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지라, 마침 마트에서 특가 상품이란 딱지를 떡하니 붙이고 있는, 무려 보리를 먹고 자랐다는 캐나다에서 날아온 삼겹살을 1kg이나 구입했다. 멀리서 오느라 수고했는데 가격까지 착하다니.. 예전에 왜 돼지가 먹은 녹차 값을 내가 내야 하냐며 볼멘소리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사실 뭐가 좋은지 하나도 모르는 너무도 무지하고도 평범한 소비자 입장에서 돼지가 보리를 먹었다니 왠지 좋은 거 같다.
점심때 고기를 삶을 물을 올리고 냄새를 잡을 수 있다는 나름의 비법(정확히는 그냥 어디서 주서들은)으로 커피 한 봉지를 풀어 넣고, 된장 한 숟가락을 떠 넣은 후 월계수 잎 하나를 동동 띄웠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고기를 꺼내보니 상당히 양이 많길래 나는 들뜬 마음으로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 요거 한주먹만 남겨서 저녁에는 김치찌개 끓여먹자~"
생각만으로도 군침이 꿀꺽 넘어가는 김치찌개를 떠올리며 삼겹살 한 덩이를 잘라 비닐봉지에 넣었다.그리고 냉장고에 넣었다.
그러니까, 고백하건대 나는 냉장고 청소를 자주 하는 깔끔인이 아니다. 그래서 가다가다 한 번 그 속을 다 들춰내는 날이면 언제쩍에 사서 넣어놓은 건지 알 수도 없는 유물들이 종종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 유적 발굴 성과가 큰 날에는 어쩔 수 없이 냉장고 대청소를 하는 날이 된다.
그런데, 점심에 수육을 적당히 먹고 저녁에 먹을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떠올리며 나름 설레는 오후 시간을 다 보냈는데, 그러니까 바로 어제 내 하루의 마무리가 냉장고 청소의 날이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런 날이었다.
'어? 응? 이상하다... 아까 분명히 넣었는데... 어디 갔지...'
아마도 이런 상황을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하던가. 바로 낮에 잘라서 비닐에 고이 싸서 넣어 두었던 삼겹살 덩어리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혹시 남편이 어디로 옮겼는지, 아니면 아이가 다른 걸 꺼내다가 떨어트리기라도 한 건지, 그야말로 냉장고는 싹 다 털림을 당했고, 냉장실 친구 냉동실도 함께 수색을 당했으며, 냉장고 주변까지도 샅샅이 뒤졌건만... 없! 다!
내가 기억하는 건고기를 잘라 비닐에 싸서 냉장고에 넣었다는 것인데, 이건 분명 냉장고가 먹은 거다.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있나...
내 눈을 못 믿겠어서 남편에게 2차 수사를 맡겼다. 나보다 물건을 잘 찾는 건 인정하는 바이기에 나의 온 신뢰와 막중한 임무를 그에게 떠넘겼으나, 그 역시도 사라진 삼겹살을 찾아내지 못했다. 어디 갔니 도대체...
설레는 맘으로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상상하던나는 그 어떤 대체제로도 김치찌개를 끓일 기분이 아니어서, 홧김에(??) 고구마를 구웠다. 뜬금없는 구황작물로 저녁 식사를 맞이한 남편은 마치 입맛이 없다는 듯 한 개를 까먹고 자리를 펴고 누웠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해맑은 딸내미는 '고구마 맛있다'를 연발하며 두 개나 먹어 치웠다. 바로 그 저녁상에 올라왔어야 할 맛있는 김치찌개를 떠올리며 나 역시 뜨거운 고구마 한 개를 우걱우걱 먹었다(속상하다고 굶지는 않는다)
원래 저녁 식사를 가볍게 하는 남편은 일부러 그러려니 생각했는데, 잠시 후 그는 부스럭부스럭 부엌에서 뭔가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 끝에 내 코에 와닿은 건 바로 라면의 향기였다. 그는 전혀 입맛이 없었던 게 아니었을 뿐이고, 그저 기대하던 김치찌개의 부재가 속상했던 것이다.
그랬던 그는 계란, 떡국떡, 치즈까지 야무지게 넣어 분식집 뺨치는 라면을 끓여냈다. 그 라면을 바라보며 '한 젓가락만 줘'라는 말을 용케 꺼내지 않는 나는 오늘까지도 그 삼겹살의 행방불명에 상당히 상심해있다. 그리고 한 때 반짝반짝 빛나던 나의 기억력이란 세월과 함께, 출산과 함께 이렇게 빛이 바래 퇴색되었음에 그저 쓸쓸함을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