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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마뮤 Dec 13. 2021

시험 5분 전, 그 아찔함의 기억

하루를 시작할 때 커피 한 잔이 아니면 쉽사리 맑은 정신을 불러오지 못한 세월이 꽤나 오래다. 직장인이던 시절은 말할 것 없이 아침 출근과 함께 손에는 진한 아메리카노가 사시사철 들려져 있었고, 마치 매일 아침 어떠한 경건 의식을 치르듯 지금까지도 아침에 커피를 한 잔 마시지 않으면 하루의 시작을 실감하기가 어렵기까지 하다.


카페인의 효용과 폐해에 대한 연구는 어찌나 천차만별인지 잊을만하면 하루에 몇 잔까지는 외려 건강에 좋다고 하는 연구 결과가 있는가 하면, 카페인은 백해무익이라며 커피를 끊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게들 해대니 도무지 어느 장단에 놀아나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남들이 뭐라고 하건 간에 커피에 관해서만큼 나만의 철저한 수칙이 생겨난 것은 전적으로 내 몸이 카페인에 반응하는 민감도가 세월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이다.




대학교 1학년, 전과(轉科)로 인해 정확히는 대학 생활 2년째였던 그 시절, 기말고사가 한창이던 때였다. 나름 준비성이 좋은 축에 들어가는 나이지만 유독 시험공부만큼은 최대한 임박하여 밤을 꼴딱 새우며 벼락을 쳐대는 게 미덕이었던지라, 음악사(Music History) 시험 전날 늦은 새벽까지 커피를 들이부으며 속성 암기에 열을 올렸다. 물론 시험 자체가 단답형 객관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속성으로 외운다기보다는 최대한 텍스트 북의 전반적 내용을 머릿속에 욱여넣는 작업이었다. 주전자에 하나 가득 커피를 내려 그야말로 엄청난 양의 카페인을 수혈했건만, 세상 그 무엇보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릴 재간이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건 커피를 열심히 마시며 책을 읽고 있었다는 것. 딱 거기까지다.


혼. 비. 백. 산.

다음 날 아침이라고 여겨지는 밝은 햇살에 나는 용수철이 튕겨 나가듯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돌아본 시계는 8시 5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험 시작 5분 전이었다. 머릿속이 새하얗다. 나는 튀어나오도록 커다랗게 확장된 눈으로 오빠 방으로 뛰었다.


"오빠!! 나 시험 5분 남았어!!!"


더 웃긴 건, 나와 그다지 다를 바 없는 한심한 대학 시절 와중에 있던 오라비한테 앞뒤 정황 다 떼먹고 단 한마디를 외쳤는데, 평소 잠 한번 깨려면 세상 힘든 우리 오라비가 자다 말고 단번에 뜻을 접수하고는 역시 용수철 튕기듯 뛰쳐 일어나며 외친 한마디는 이거였다.


"야!! 연필 챙기고 튀어나와!"


볼펜도 아니고 왜 연필이었는지 정말 알 수가 없으나, 그 순간 평소 남매로서 쌓였던 묵은 감정이 모두 사라지는 듯하며 마치 나를 이 세상에서 구해주러 나타난 어벤저스 같아 보였다. 하여간 그렇게 옷가지만 겨우 갈아입고 필기구를 낚아 채 오빠와 나는 차를 향해 뛰었고, 무슨 레이싱카 선수처럼 거칠고 험난하기 짝이 없는 곡예 운전을 시작한 오라비의 모습은 진정 본인이 시험에 늦은 당사자인 양 진심으로 동생을 순간 이동시켜 강의실에 냅다 던져 넣겠다는 일념 하나로 눈에서는 광선을 쏘는 듯했다.


가뜩이나 복잡한 출근길 러시 아워(rush hour)에 걸려들어 아무리 곡예를 하더라도 이건 답이 없었다. 어떻게 가더라도 9시 30분에 맞춰 가면 그나마 천운일 텐데, 한 시간짜리 시험에 그렇게 해서 가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은 그 슈퍼영웅은 갑자기 차를 세웠다.


"집으로 가자..."

"?????(동생둥절)"




그 시절 카페인은 내게 있어 각성제가 아니라 그 어느 시간에 마시건 간에 수면제였음이 분명하다. 카페인의 위력을 맹신하며 벼락치기하던 나는 도대체 몇 시쯤 침대로 옮겨 갔는지 나의 행동에 대한 기억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으며, 그저 눈을 뜬 순간 맞이한 대 혼란의 아침이 마치 필름을 뚝 끊어 편집하듯 바로 다음 장면으로 등장했을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의관을 정제한 내가 향한 곳은 한국인 의사가 운영하는 병원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아파야만 했다. 무조건 어떻게든 뭐가 됐든 병을 만들어내야만 살 수 있었다.

평소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정말 하기 어려워했던 나는 개미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요 선생님.... (하아....) 제가.... 진짜 어디가 아픈 건... 아니고요..... 저기 그러니까... 제가 부득이.. 지금 상황이 그러니까... 그 진단서가 좀 필요한데요....(쭈글)"


선생님은 영 마뜩잖아하셨지만 '죽을' 사람 살린다는 심정이셨는지 좋지 않은 표정으로나마 진단서를 한 장 떼어 주셨다.(어디가 아팠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 아마도 몸살감기 정도 아녔을까) 물론 지금도 생각하면 그 의사 선생님께 너무도 죄송하지만, 불쌍하고 철없던 대학생 하나 살려주셨음에 그저 감사의 마음만 가져본다. 그 진단서 덕분에 나는 얼마 후 교수님 방에 앉아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그렇게 퍼부어 마셔도 잠을 부르던 커피가 30대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부터 아주 지독한 각성제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카페인에 상당히 민감한 사람이 되어(?) 버렸고, 실제 카페인이 분해되기까지 걸린다는 10시간을 꼬박 채워야만 겨우 잠이 오는 현상을 쉽사리 경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오후 12시를 기점으로 이전에는 일반 에스프레소를, 이후에는 디카페인이 아니면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이제는 건강한 생활을 위해 수면의 양과 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너무도 실감하는 중년이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커피 한 잔을 내려 마시다가 문득 그때 어린 시절 커피를 믿고 까불던 내 모습이 문득 떠올라 웃음이 났다. 위험하지만 곡예 운전을 불사하면서까지 동생을 난관에서 구해주려던 슈퍼영웅의 모습으로부터 차분히 생각을 정리 후 진단서를 떼어 제출하라는 돌파구 전략까지 짜주었던 제갈공명 뺨치는 친정 오라비에게 안부 전화나 해봐야겠다. 그때 참으로 고마웠다고...

보나 마나 세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나를 자기가 업어 키웠다고 온갖 생색을 낼 것이 분명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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