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남자는 어릴 적부터 그렇게도 게임이 좋았단다. 그리 좋아했던 것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으니 그냥 보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아무리 좋아하는 것도 한 다리 건너에서 바라볼 땐 멋지고 재미있어 보이지만 정작 그것이 나의 '일'이 되는 순간 재미란 눈을 씻고 찾아도 안 보이게 마련이다.
어쨌든 그리 좋아하는 것을 집에서도 참 많이 했다. 집에 있는 시간의 상당 부분을 게임하는데 할애했는데, 여느 집들은 그것 때문에 문제가 생긴 다지만, 일이 일이니만큼 게임에 대해선 내가 절대 터치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스트레스를 풀던 해보면서 트렌드 파악을 하던 그 부분만큼은 절대적으로 존중해 주자는 마음이었기 때문이다.(마음은 그러했으나 가끔 왜 이를 악물고 있었을까)
이 사람은 인생에 게임이 전부인가 싶던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떠버렸다. 정확히는 새로운 세계라기보다 어릴 적부터 로망이었던 일을 저지르겠다는 선언이었다. 바로 프라모델 만드는 일이었다.
하고 싶은 걸 하겠다는데 뭘 말리나. 늘 직장생활에 치여 피곤에 절은 모습을 보느니 뭐든 정신을 쏟고 재미를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환영이었다.(내가 잘 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원래 한국 사람은 장비빨! 동네 뒷산에 올라도 복장만큼은 히말라야 등산객이 돼야 제맛 아니던가. 프라모델이란 그저 필요한 몇 가지의 장비(내가 아는 선에서 칼과 본드 정도)만 있으면 뚝딱 만드는 줄 알았는데, 어느 날 현관문을 열고 쌓여있는 택배 박스들을 보는 순간 진심으로 눈알이 튀어나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그날 우리 집에 누가 이사 들어오는 줄 알았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로켓을 타고 배송해 주시는 분들이 매일 아침저녁으로 우리 집 앞에 수도 없이 물건을 놓고 가셨다. 장비를 갖추는데만 소요되는 기간이 족히 2주일은 걸렸나 보다. 무서워서 비용이 얼마 소요됐는지까지는 차마 물어보지도 못했다.
장비를 갖췄으니 이제 뭐가 필요할까? 그렇다. 정성을 기울여 만들어볼 프라모델들이 필요하다. 사실 본인을 위해 플렉스하는 일은 없는 남편인지라, 이번에는 취미 생활에 조금 제대로 써봐도 되겠냐는 말을 (슈렉 고양이 눈을 하고) 해오는데, 어떻게 안된다고 하겠나.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적정선에서 알아서 해보라고만 말했다.
그러니까, 사진에 보이는 박스들은 지극히 일부를 찍은 것이다. 난 이 사람이 어디선가 폐업하시는 프라모델 샵 하나를 통째로 털어온 줄 알았다. 그냥 보기만 해도 다 그놈이 그놈 같은데, 독일군, 미군, 영국군 거기에 독일탱크, 미국탱크, 전투기도 독일, 미국, 영국, 프랑스......... 너무 많아서 나열 불가다. 한 마디로 난리가 났다. 온 집안을 정말 '전쟁터'로 만들 작정인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더 기가 막힌 건 이제부터다. 만들면 끝이 아닌 거다. 그러니까, 아주 실감 나게 도색을 해야 하는 과정이 남아 있다는 의미이다. 유튜브를 찾아보고 또 보고, 프라모델 도색 전문가들이 알려주는 각종 팁들을 어찌나 열심히 보며 공부하는지 조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저런 의지라면 지구도 구하겠다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보고 따라 해 봐도 전문가들의 솜씨를 어찌 따라잡으랴. 콩알만 한 군인 얼굴에 여자들 아이라이너 붓 보다도 얇아 보이는 아주 가느다란 붓으로 숨까지 참아가며 눈알을 콕 찍고는 외치는 한마디.
"아우 C~ @$#%@"
전쟁터라 그런 걸 거야. 어디서 한 대 맞았다 치자. 바위를 뚫을 듯 온통 집중한 결과물은 대개 눈이 제대로 밤xx 상태인 경우가 빈번했다. 정말 기가 막히게 가상한 노력이다.
도색하는 붓도 정말 가지가지다. 무슨 동물의 털을 썼느냐에 따라 가격도 천차만별인 것이다. 진정 살면서 알 길이 없었던 새로운 세계였다. 심지어 더 입이 딱 벌어지게 놀랐던 건, 유럽의 돌길 바닥을 실감 나게 재현할 수 있는 툴 tool이 있는데(국수 미는 홍두깨같이 생겼다) 그게 스페인에서 날아왔다. 이젠 '진짜' 진짜 같은 전쟁터를 만들겠다는 일념하에 오만 나라에서 필요한 것들을 사들였다. 어디까지 놔둬야 하는 걸까 고민이 됐지만, 어쨌든 그것은 나의 영역이 아님을 되새김질할 뿐...
어른도 놀이가 필요하다.
자기 주도적으로 그 과정에서 기쁨을 얻는 일상의 즐거움을 찾는 것은 누구나 반드시 필요하다지 않는가. 집안을 말아먹을 수준의 것이 아니라면, 배우자의 취미 생활 영역은 그래도 분명히 존중해 주는 것이 필요하고 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족들 위해 열심히 일하는 자에게 그 정도 자유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면 어찌 살겠나.
게임이나 프라모델이나 너무 오랫동안 몰입하고 있을 땐 살짝 '밉상'이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본인이 거창하게 꾸며놓은 전장戰場을 바라보며 어찌나 뿌듯한지 한참을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땐 진짜 애 같다.
도색의 길은 멀고 험하다 보니 아직 안(못)칠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원래 남자들의 놀이란 이렇게 거창해야만 하는 건가? 내가 어릴 적 대단한 오디오 마니아셨던 우리 아버지도 불쑥불쑥 내 키만 한 스피커를 집에 들여오셔서 엄마가 뒷목을 잡으시곤 했는데, 지금껏 살아오며 경험상 느끼는 건 본인이 간절히 원하고 하고 싶은 건 주변에서 뜯어말려도 어차피 하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차라리 원 없이 저질러보도록 놔두는 게 답이다. 그렇게 실컷 해봐야 스스로 적정선을 찾는 시기가 분명 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