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잠을 잘 잔다. 그게 자랑거리가 될 줄은 몰랐는데 중년에 들어서니 잠을 잘 잔다는 건 대단한 축복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주변에서 하나둘 잠을 잘 못 자 몸이 힘들다는 호소가 들려오는데, 멀리 볼 것도 없이 남편과 친정 식구들은 때때로 숙면을 취하기 위해 멜라토닌 성분의 보조제를 섭취해야 할 때도 있다. 실로 잠을 잘 못 자는 현상 역시도 노화의 과정인 것이다.
사람이 건강하기 위해 좋은 수면이 어느 정도로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익히 연구가 쏟아져 나와있다. 잠을 그저 자는 게 아니라 수면에도 단계가 있다고 하는데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단계- 깨어있음과 잠든 상태의 사이, 잠으로 가는 전환의 단계 2단계- 주변의 상황에 대한 인식이 저하되며 호흡과 심박수가 안정되는 단계 3단계- 근육의 긴장이 풀리고 혈압, 호흡수, 심박수가 안정되며 깊은 수면으로 돌입하는 단계 4단계- 신체가 이완되고 뇌는 활동적인 상태로 REM수면으로 가는 단계 (출처: 구글)
사람마다 잠에 빠져드는 속도와 리듬은 모두 달라서 깊은 수면의 단계까지 이르는데 한참을 소요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처럼 신체 일부가 어디 닿기만 해도 초고속으로 렘수면을 향해 직진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지금도 그러한데 성장기에는 오죽했을까. 친정 오라비는 항상 바로 잠드는 나를 신기해하며 놀리곤 했다. 어느 정도로 생각이 없으면 바로 잠이 들 수 있냐는 타박이 늘 따랐다. 모르긴 몰라도 그 말에 가스라이팅을 당한 것이 분명한 나는, 내가 정말로 생각이 없는 인종이라 잠을 잘 잔다고 믿으며 살아왔다.(그러나 에니어그램을 공부해보니 나는 지나치리만큼 생각이 많은 유형임을 알게 됐다-나름의 변명)
지금은 남편이 놀릴 때가 많다.
"여보 자?"
"....... 응"
"여보 자?"
".........."
내가 잔다고 누우면 자냐는 질문을 반복적으로(일부러) 한다. 사실 그리 몇 차례 반복하지 않아도 이미 '대답 없는 너'가 되어 버리는 게 재미있다고 그걸 그리 매번 한단다.(세상에! 그럴 시간에 잠을 청해보시지)
간밤에 인천 지역에서 지진이 일어났단다. 사실 핸드폰에 '안전 안내 문자'를 모두 수신하게 켜 두었더니 세상에 요즘은 뭘 이런 것까지 문자로 보내나 싶은 TMI들이 수도 없이 들이치는 바람에, 그야말로 공해가 되어 사실 문자 수신을 꺼두었다. 그러나 정말 긴급한 재난의 상황만큼은 모르면 안 될 테니 '긴급 재난 문자'만큼은 큰 소리로 울릴 수 있게 옵션을 조정해 뒀다.
매일 새벽 기상을 하는 나는 사실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손에 집어 들고 알림 상태만 한번 쭉 체크하는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지진이 났다는 재난 문자의 내용이었다.
'아니, 이렇게 긴급한 재난 문자는 큰 소리로 울리도록 바꿔놨는데 왜 안 울렸어? 허참.. 전화기가 이상한가..'
애먼 전화기를 탓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아침에 기상한 남편이 말한다.
"아우 어젯밤에.. 내 전화랑 당신 전화랑 동시에 막 삐~~~~ 울리는데, 우리 집만이 아니라 아래 윗집 사방에서 다 울리니까 그 입체 사운드가 아주 난리도 아니더라.."
"응????? (뭐가 어쨌다고?? 동공확장)"
"하긴... 그냥 잘~ 자더구먼.. 소리 엄청 시끄러웠는데..."
"어어~? 난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먼산)"
"당신은 자다가 전쟁이 나도 푹 잘 자다 봉변당하겠어..."
"그럼 그렇게 잠귀 밝은 자기가 좀 깨워주지, 잘 자라 하고 혼자 도망갈래?"
"(웃음)"
세상에... 난 진짜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 자다가 누가 업어가도 모르겠다는 말의 주인공이 바로 나다.(물론 나를 쉽사리 업을 수 있을 사람은 없겠지만... )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얻은 별명이 '잠만보'다. 사실 잠만보가 뭔지 잘 모르지만 잠과 관련이 있음은 글자만으로도 알겠기에 구글에서 잠만보를 검색해 봤다. 검색 결과 나온 것은 포켓몬 캐릭터였다. 요즘 아이들 사이에 포켓몬이대유행 중인데, 여하 간에 모르긴 몰라도 이 잠만보라는 녀석은 엄청난 양의 먹이를 먹고 잠을 잔단다. 심지어 먹이를 먹는데 집중한 나머지 털 밑에 숨긴 먹이에 대해선 잊고 잠을 잘 정도라고 한다.(세상에 갑자기 뜨끔 한 건 뭐지...)
출처: 나무위키(귀여운 잠만보가 엄청나게 먹고 퍼져 자면 변하는 상태인 거다이맥스)
남편은 하고 싶은 것들을 떠올리면 잠자는 시간이 아깝다는 사람이다. 그런데, 나는 잠자는 시간이 너무 좋다. 피로가 풀리기도 하지만 사실 머릿속이 복잡할 땐 잠을 청하면 그 순간만큼은 다 잊을 수 있고 그야말로 간혹 기분 좋은 꿈나라에 갈 때도 있는 데다, 그렇게 자고 난 후에는 생각이 좀 가벼워지기도 하니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복잡한 머릿속 때문에 잠을 못 이루는 남편 같은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짓는다. 우린 참 비슷한 점이 많다면서도 잠에서만큼은 극명하게 입장이 갈린다.
갱년기의 한복판에 돌입하면 잠으로 인해 겪게 되는 애로사항이 참으로 많아진단다. 이렇게 잠을 잘 자는 나도 몇 달 전 희한하리만치 잠이 줄어 깜짝 놀란적이 있다. 그래서 나 역시 제대로 노화가 찾아오는 모양이네 했었는데, 새해의 시작과 함께 새로운 마음으로 잠이 리셋된 걸까.
커피 한 주전자를 들이부어 마시고도 잠에 푹 빠져 시험 시작 5분 전에 잠을 깼던 나이지만(시험 5분 전, 그 아찔함의 기억) 그래도 잠이 줄었으니 매일 새벽을 깨우며 미라클 모닝을 할 수 있는 거겠지. 노인들은 새벽잠이 없잖아~라는 말이 아직은 내 얘기가 된 건 아니라고 부득불 거부하고 싶지만, 100세 시대에 노인 되려면 아직 멀었다 하지만, 세월은 초스피드로 흐르고 있으니 어쩌겠나. 어쨌든 잠이 많은 것도 축복임에 누릴 수 있을 때 감사히 누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