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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마뮤 Jun 02. 2021

수박 한 덩이에 담긴 그때 그 여름

이제 슬슬 날이 여름을 향해 가는구나 싶다. 새해 인사를 나누던 게 언제라고 벌써 6월의 문턱을 밟자니 눈치 없이 빨리 가버리기 바쁜 시간이 야속하다.

내게 있어 여름을 알리는 첫 신호탄은 마트에 등장하는 수박이다. 요즘은 하우스 재배로 인해 꼭 여름이 아니어도 먹자 들면 구할 수 있는 과일이 된 듯 하지만, 내 어릴 적 여름을 대표하는 과일은 단연코 수박만 한 게 없었지 싶다. 더운 한 여름 선풍기 바람을 쐬며 돗자리 깔린 마루에 앉아 수박 물을 뚝뚝 흘리면서 한입 가득 와구와구 입에 넣기 바빴다. 옷에 과일 물이 들면 빨아도 잘 지워지지 않는다며 우리 엄마는 커다란 수건을 목에 둘러주시곤 했다. 그럼 마치 최종 병기라도 얻은 듯 기세 등등하게, 수박을 입으로 먹는 건지 얼굴로 먹는 건지, 그렇게 세모 낳고 커다란 수박을 향해 돌진하곤 했다.




지금은 품종도 다양하게 계량이 되어서 수박도 종류가 참 다양하다. 어릴 적 먹던 수박은 그저 크고 아주 동그란 모양이었는데, 어느 때부터인지 외국 사람들이나 먹는 줄로 알았던 책에서 본 기다란 타원형의 수박이 우리나라에도 등장했고, 초록색에 선명하고 굵은 검은색 줄이 지글지글 있는 수박만 있는 게 아니라 진녹색에 줄이 안 보이는 수박이 있는가 하면, 속이 노란 망고 수박도 있다. 수박에까지 이렇게 다양성이 적용될 줄이야...


내 어릴 적 기억 속 그 커다랗고 동그란 초록색 수박들이 잔뜩 쌓여 있는 과일가게에 가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수박을 통통 두드려보는 게 일이었다. 언젠가 수박 잘 고르는 법을 알려주는 프로를 본 적이 있는데, 실제 소리를 통해 얼마나 잘 익었는지의 여부를 알아내는 건 그다지 정확한 방법은 아니라고 했던 것 같다. 다만 검은색 줄의 굵기와 선명함을 짚어 주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들어도 솔직히 잘은 모르겠다. 어쨌든 내가 어릴 적 모든 사람들이 하던 것 같이 그저 수박을 보면 한 번씩 통통 두드려보곤 한다. 사실 어떤 소리가 '나 잘 익었소'라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냥 두드려 보고 내 귀에 듣기 좋은 소리를 내주면 그 수박이 바로 나하고 함께 갈 선택받은 수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얼마나 달고 맛있을지는 그저 복불복인 듯하다.)


옛날 과일가게 아저씨들은 날렵한 과도칼을 손에 들고 수박을 두드려 보며 거침없이 한 구석을 세모 모양으로 자르고는 그 세모의 중앙 지점을 칼로 푹 찍어 마치 무 뽑아내듯 수박 조각을 꺼내 얼마나 빨갛고 맛있게 익었는지를 보여주곤 했다. 그럼 빨간 수박 살이 마치 피라미드 모양처럼 가지런히 달려 나오곤 했는데, 그 수박 조각을 보는 순간부터 어찌나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던지... 비닐끈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수박 끈'에 담긴 그 커다란 과일을 엄마와 낑낑대며 들고 집으로 오는 길 내내 머릿속은 온통 달콤한 빨간 조각을 입에 넣을 생각뿐이었다.


집에 와서 그 수박이 도마 위에 올려지 과일가게 아저씨가 노련하게 푹푹 잘랐던 그 세모 뾰족한 수박 조각을 누가 먹을 건지 치열한 신경전이 시작된다. 오빠와 나는 그걸 서로 먹겠다며 달려들곤 했는데, 솔직히 너무 오래전 일이라 오빠랑 사이좋게 나눠 먹었는지, 아니면 순번을 정해 이번엔 오빠가 다음번엔 내가 먹었었는지, 그도 아니면 급기야 싸움으로 번져 둘 다 못 먹게 됐었는지의 여부가 기억나지 않는다.(헛웃음) 한때 기억력만큼은 세계 1등이라 자신했는데, 요즘 말로 아이 낳을 때 뇌를 함께 낳아 버려 정말로 기억력이 그 어느 때보다 형편 없어짐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어찌 됐건 그 수박 조각을 엄마가 드셔야 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못했던 한낱 철부지들이었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래서 어릴 적 여름 방학만 되면 시골 할머니 댁에 다녀왔다는 친구들이 그렇게도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러던 내게도 귀한 시골체험의 기회가 왔는데, 외증조할머니 댁에서 가지고 계시던 큰 과수원에 놀러 가게 된 것이었다. 증조할머니 밑으로 대가족이 그물망처럼 펼쳐져 있었으니 사실 그 과수원을 방문하는 건 아주 직계라고도 볼 수 없는 내게는 큰 행운의 기회와도 같았다.


도시 촌놈이던 나는 경운기를 타는 게 세상 그 어떤 놀이기구보다도 재미가 있었고, 과수원에 수많은 어르신들이 함께 사과를 따는 광경은 어린 내 눈에 그렇게도 굉장하게 보였더랬다. 아직 덜 익은 초록색 풋사과를 잔뜩 인상 써가며 서걱서걱 베어 먹는 재미도 쏠쏠했고, 그 무엇보다 아직도 생생히 내 기억 한편을 사로잡고 있는 건 동네 어르신께서 밭에서 바로 따다 투박하게 마구 잘라 주시던 수박이다.


어쭙잖게 깔끔했던 나는 사실 집을 벗어나면 화장실도 못 가는 까탈 쟁이였는데, 밭에서 금방 따온 수박을 양동이를 받치고 아무렇게나 잘라 흙바닥에 앉아 먹으라니, 그게 그렇게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행여라도 수박에 흙이 튀어 묻기라도 하면 어쩌나 안절부절 속이 타들어 갔다.

건네주시는 너무나도 커다랗고 마구 잘린 수박 덩어리를 마지못해 받아 들고 불편한 마음으로 한입 베어 무는 순간 머릿속에는 불이 켜지고 눈썹은 치켜 올라갔다. 세상에.. 내가 여태 살아오며 한 평생 동안 먹어본 수박 중 단연코 가장 달고 맛이 좋았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때의 달콤함을 거의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내 머리와 가슴은 다 기억하고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 시골의 정취와 너른 수박밭, 한없이 사람 좋은 동네 어르신의 인심, 그 모든 것이 삼박자를 이루어낸 최고의 달콤함이었겠지만 말이다. 아무리 당도를 보장한다는 마트의 그 어떤 수박도 지금껏 내게 그런 달콤함을 선사하진 못했던 것 같다.




수박은 그냥 다 물이지 무슨 영양분이 그리 많겠어 싶다면 수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말씀이다. 비타민A, B, C 가 골고루 들은 것뿐만 아니라 칼슘, 인, 철 등의 미네랄이 풍부하다고 한다. 그리고 수박의 붉은색을 띠게 하는 '라이코펜' 성분은 강력한 항산화 물질로 실제 항암효과가 있는데, 라이코펜이 풍부한 항암 음식으로 대표적인 토마토 보다도 수박에 1.5배 더 많이 함유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시트룰린 성분은 혈압과 협심증 개선 등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전에 TV에 나오신 어떤 어머님이 매 끼니 전 수박을 갈아 그야말로 한 사발씩 들이키고 식사를 하셨더니 살이 쪽 빠졌다며 수박이 얼마나 다이어트에 효과가 좋은지를 다뤘었는데, 그걸 보고한동안 수박을 갈아먹겠다 냉장고 속이 온통 수박으로 가득 채워졌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리 좋아하는 수박도 사명감에 젖어 먹자니 너무도 고역이었던지라 얼마 못가 모두 퇴출당한 안타까운(?) 경험도 있다. 그때 정말 좋아하는 음식은 함부로 다이어트에 활용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냥 먹으면 한없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다이어트'라는 말만 끼면 모든 게 다 힘들어지나 모르겠다. 정말 사람의 마음이란... 그냥 맛있으면 0칼로리를 신봉하며 돼지런하게 살고 말련다.


어찌 됐든 여러모로 건강에도 도움이 되고, 심지어 빨갛고 예쁜 게 그렇게 달콤하고 맛있기까지 하다니, 내게 있어서 수박은 여름을 알리는 신호탄일 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천상의 과일이라 여겨진다. 지난여름은 하도 비가 많이 와서 뜨거운 여름날 시원하게 수박을 먹는 기분을 크게 즐기지 못했던 것 같은데, 올해 여름은 또 어떠려나.. 기후 변화로 인해 다소 당황스러운 상황들을 자주 접하며 살게 되는 거 같은데, 올여름엔 좀 많이 뜨겁더라도 그 더위를 훅 날려줄 달콤한 수박과 함께 제대로 여름을 만끽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때 내 어릴 적 그 여름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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